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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KBS 해설위원은 “결승전의 숨은 MVP는 김민재”라면서 “일본의 역습을 잘 막아냈다”고 극찬했다. 과연 그랬다. 김민재는, 특히 일본전에서, 폭우를 쓸어버리는 자동차 와이퍼처럼 깔끔하고도 신속하게 일본 공격을 차단했다. 최용수 SBS 해설위원은 황의조를 극찬했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황의조가 골을 터트렸을 때 “클래스가 다르다.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다”고 했는데 베트남전에서 황의조가 골을 넣자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다고 했는데 부끄럽다. 사과하고 싶다”고 축하했다. 한편 안정환 MBC 해설위원은 수비수 김진야를 “정말 대단하다. 뛰어난 기술과 지치지 않는 체력”이라고 격려했다. 김진야는 이제 ‘철강왕’으로 불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사실 손흥민을 잠시 괄호 안에 넣고 젊은 후배들부터 극찬하는 마음일 것이다. 6월의 러시아와 달리 8월의 인도네시아에서, 그라운드 안의 독전관은 손흥민이었다. 그는 골키퍼 자리를 빼놓고는 거의 모든 역할을 수행했다. 자신이 공을 찰 수 있음에도 황희찬이 의욕을 보이자 뒤로 물러섰고 금메달 결승골을 터트릴 수 있음에도 이승우가 ‘나와, 나와’ 하자 순간적으로 공과 멀어졌다. 조제 무리뉴 감독은 페널티킥을 실패하는 선수가 아니라 그 자리를 두려워하는 선수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손흥민은 어디에나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손흥민이나 득점왕 황의조를 괄호 안에 넣고, 누가 이번 대회 MVP냐고 묻는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황인범이라고 외치고 싶다.

거의 모든 골에 관여한 황인범은, 현대 축구에서 요구되는 세 가지 요소, 즉 탁월한 개인 기술과 높은 수준의 전술 이해 그리고 막판까지 이 두 요소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는 체력 안배 기술을 갖고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체력’이 아니라 그것을 완벽하게 조율하여 90분 내내(때로는 120분) 최고의 기술 상태를 유지하는 ‘밸런스’ 말이다. 황인범의 땀은 그라운드 모든 곳을 골고루 적셨다.

황인범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공을 정확히 간수한다. 이로써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자신의 공간을 명확하게 지배한다. 공을 안정적으로 간수해야 공간을 지배하게 되는데, 경기 초반에 이 능력이 의심받을 경우 상대 수비수들은 여지없이 달려든다. 이럴 때, 공간 지배는 고사하고 황급히 패스부터 하게 되는데 의미 있는 공격 작업은 무망해진다. 반면 황인범의 첫 터치는 환상적이다. 일본전의 결승골, 이승우가 파리채를 휘두르듯이 터트린 슛은, 바로 직전 상황에서 아주 높이 떠오른 공을 황인범이 제 몸의 일부처럼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차례 이런 장면을 보여줬기에 최용수 해설위원은 “공을 저렇게 간수하는 선수는 근래 보기 드물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공을 다스린 후 황인범은 어떻게 했던가. 그는, 흡사 대여섯 개의 눈이라도 달린 듯 지체 없이 킬 패스를 찔러 넣거나 좌우로 흔들면서 공간을 찾아 나섰다. 공은 언제나 그의 발에서 1m 이내에 머물렀다. 그의 패스는 간결했고 빨랐으며 정확했다. 가까이로 손흥민을 보았고 멀리로 황의조를 의식했다.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 이해도의 측면에서도 황인범은 원숙했다. 김학범 감독은 베트남전에서 황인범 대신 이승우를 선발 투입했다. 기술적인 우위가 확연하게 증빙되었기 때문에 초반부터 골을 집어삼키기 위한 공격 전술이었다. 반면 일본전에서는 황인범이 먼저 그라운드를 종횡으로 누볐다.

김학범 감독은, 특유의 세밀한 기술 축구를 가진 일본전의 승부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조커를 활용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병법을 선수들에게, 무엇보다 황인범에게 정확하게 지시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안정감 있게 경기 템포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거세게 밀어붙인다는 전략! 이를 위하여 황인범은 평소 포지션에서 조금은 더 밑으로 내려와서 견고하게 팀 밸런스를 유지했다.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왔고, 이승우가 투입되었으며, 황인범 또한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팀 전체의 무게중심이 황인범에 의하여 공세적으로 전환되면서, 골이 연거푸 터졌다.

걸출한 스타에 비유를 하자면, 한순간에 수비 라인을 허물어 버리는 전성기의 이니에스타 혹은 크로아티아의 모드리치와 같은 기술을, 그 우아한 스타일을, 그 완벽한 밸런스를, 무엇보다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 명령서를, 황인범은 그라운드에서 정확하게 구현해냈다.

미래의 잠재력이 아니라 입증된 실력이란 점에서, 소속팀이나 대표팀에서 황인범은 귀한 선물이다.

프로축구 K리그2의 대전시티즌은 최근 5경기 무패로 상승세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골이 귀하다. 이 상황에서, 유성중과 충남기공을 거친 프랜차이즈 스타 황인범이 조기 전역하여 가담하면 상위권 도약이 가능하다.

파울루 벤투 감독도 일찌감치 황인범을 선발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기성용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다. 만약 그가 그렇게 결정한다면 아쉽기는 해도 막을 수는 없다. 머지않아 그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 대안을 ‘신중하게 서두르는’ 게 정답이다.

이미 황인범은 리스본의 양대 라이벌인 명문 벤피카와 스포르팅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벤투 감독은 바로 그 도시 출신이다. 감독은 자기 스타일을 몸으로 구현할 선수를 찾기 마련이다. 공세적인 패스 축구를 지향하는 벤투 감독의 전술 플랜에 황인범이라는 엔진이 탑재된다. 같은 포지션에 주세종과 이재성이 있어 당장 주전이 될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기성용 혼자 전담하던 공격 루트 찾기에, 급가속이 가능하고 코너링이 뛰어난 황인범이 가담하게 되면, 그 어떤 공성전에서도 일단 슈팅 찬스만큼은 낚아챌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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