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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무려 전체 9권 3800쪽 분량의 <제5공화국 전사>를 확보했다고 해서, 나는 당장이라도 편집국에 찾아가고 싶었다. 혹시 신문사 안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도 없나 하고 생각도 해봤다. 법정 공방까지 벌여가며 1년5개월 만에 확보한 ‘전사’를, 염치불구하고 복사를 하든지 아니면 밤새워 필사라도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사(全史)’가 아니라 ‘전사(前史)’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5공화국의 전체사가 아니라 5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의 기록 말이다. 이런 ㅠ.ㅠ

물론 이 자체로 엄청난 기록이다. 10·26 시해 사건과 12·12 사태 그리고 무엇보다 5·18 광주항쟁에 관한 핵심 인물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형사적 죄책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전체사’였다고 하면, 요즘의 내 집중적인 관심사, 즉 88서울올림픽에 대한 5공 수뇌부들의 이데올로기를 실체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88올림픽에 대한 핵심 행위자들의 기획과 집행이 중요한 까닭은, 이 엄청난 스포츠 스펙터클에 대한 기존의 이해는 이른바 ‘3s 정책’ 정도이기 때문이다. 각종 프로스포츠와 특히 88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는 특정 국면의 타개 전술 정도가 아니다. 국가는 그렇게 수세적이고 방어적이지 않다. 특히 매우 공격적인 독재정권이 권력을 부당하게 찬탈하여 국가의 운전대를 잡게 되면, 그 순간 이후 국가는 폭주한다.

5·16이 그랬고 12·12가 그랬다. 권력을 움켜쥔 군부는 의회나 언론 같은 브레이크 장치를 제거해 버리고 순식간에 진격한다. 거의 1년 안팎에 정치와 행정의 중심을 거머쥘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전개하고 거대한 문화 통치 전략을 구사한다.

스펙터클 문화 통치라는 측면에서, 5공화국이라는 진격의 국가는 88올림픽을 기획하고 그것을 ‘범국민적’으로 집행하여 결국 그 책임자가 ‘6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대단원으로 강력하게 자기 조정을 해나갔다. 정치학계에서는 1987년 민주화 운동과 그해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그람시가 말한 ‘수동혁명’이란 관점에서 분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문제 설정이 크게 보아 타당하다면, 나는 88올림픽이야말로 국가권력의 강력한 수동혁명의 엔진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판단 근거들은, 극단의 정치와 스포츠 스펙터클 신드롬 사이에 넓게 퍼지기 시작한 1980년대의 중산층 문화다. 긴박한 정치 정세와 다소 무관하게, 1980년대는 3저 호황과 내수 소비 활황 속에서 컬러 TV와 마이카와 외식으로 대표되는 중산층 문화의 확산 과정이었다. 그 정점은 물론 아파트다. 이 경제문화의 조건에서, 진격의 국가가 휘날리는 88올림픽이라는 깃발을 따라 ‘범국민적’인 중산층 욕망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이렇게 두루 살필 때, 88올림픽을 ‘3s 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의 극히 작은 부분을 가리킬 뿐이다.

어느덧 88올림픽 30주년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나는 이러한 관심사에 자극을 주는 작업들을 보게 되었다. 스포츠 전문기자 위원석은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전후로 한 박정희 대통령 및 그 무렵의 스포츠 권력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88올림픽이 비틀거리는 3공화국의 짙은 한숨 속에서 이미 기획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김운용이나 박세직의 자서전은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의 회고록도 참조하고 있는데, 이 기록들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증은 더 필요하지만, 어쨌거나 1980년대 전후의 혼란 속에서 권력 수뇌부들이 올림픽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권력의 중심이 지향하는 바와 그 언어들을 검토하건대 결코 올림픽은 ‘3s’ 같은 단순한 정책이 아니다.

위원석이 참조하였듯이, 허진석이나 박재구가 쓴 학위 논문들도 올림픽을 특정한 정치세력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의 작동 원리 속에서 접근하고 있어 흥미롭다. 88올림픽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해온 박해남도 국가권력이 스포츠팬들보다 훨씬 더 스포츠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밝혀왔다. 그가 오랜 연구를 총집하여, 88올림픽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학위 논문으로 결산하였다고 하니, 읽고 싶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관심을 어려운 자료나 논문에 기대지 않고, 그저 편하게 57분 정도로 화면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터넷을 검색하면 된다. KBS 스포츠국의 이태웅 피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88/18> 말이다. 지난 9월16일에 방영되었는데, 88올림픽도 1988년 9월17일에 개막되었으니, 정확히 30주년이다.

무려 15테라바이트(TB) 분량의 KBS 영상자료를 바탕으로 일단 40시간 분량을 추려내고 이를 다시 약 57분으로 적극적인 편집과 연출을 한 작품이다. <천하장사 만만세> <공간과 압박> <숫자의 게임> 등 독특한 ‘작가주의적’ 관점의 쾌작을 만들었던 이태웅 피디는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모든 면에서 올림픽이 관련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판단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 TV 다큐의 공식과도 같은 쉼 없는 내레이션이나 과장된 효과음 하나 없이, 오로지 당시의 방송 화면들과 88올림픽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의 인터뷰만으로 이어지는데, 그 형식 자체가 흥미롭다.

이 다큐는 허화평으로 시작해서 그의 논평으로 끝난다. 다큐의 끝에서 그는 말한다. “88올림픽이,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싫어도, 절대 그런 생각이 없었어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도록 만들었다.” 글쎄, 여러 각도의 자료와 해석이 더 필요하지만, 최소한 더 이상 ‘3s 정책’ 같은 말로 스포츠 스펙터클을 판단하는 것은 부족하고 게으른 것임을 확증하는 ‘5공 실세’의 증언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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