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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틀림없이 김연아는 불쾌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교생 실습에 나섰을 텐데 저명한 심리학자가 보여주기 위한 쇼라고 비판했으니, 상처 입었을 것이다. 사실 ‘쇼’를 하려고 해도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 많은 게 학교 현장이다. 교사들도 수십 명이고 학생들은 수백 명이다. 몇 번 얼굴만 비치고 만다면 금세 실망스럽다는 글이 봄날의 벚꽃처럼 인터넷에 흩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얼굴만 잠깐 비치고 광고 찍으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란이 된 황상민 교수의 발언을 보니, 이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황 교수가 단정적으로 말한 측면이 있다. 김연아로서는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명예훼손인가 하면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고 고소까지 할 일인가 하면 글쎄,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 이유를 적어본다.
서울 역삼동 진선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김연아가 '피겨 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우선 법정에서 이긴다 해도 실익이 크지 않다. 여론은 전체적으로 황 교수의 사실 판단 착오와 표현의 과잉을 비판하고 있다. 황 교수도 비록 자기 방어적 측면이 강하지만, 사과의 뜻을 밝혔다.
만일 법정으로 갈 경우, 황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김연아가 교생 실습에 나설 만큼 대학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는지를 되물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전지훈련이나 대회 참가로 해외에 머물러야 했던 김연아로서는 학교 측의 ‘여유 있는’ 규정 해석이나 배려에 따른 ‘비출석 과제물 대체 이수’ 등을 밝혀야 하는데, 이 경우 잃는 것이 더 크다. 사실에서 이긴다 해도 특혜 논란에 또 휘말릴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스포츠교육의 불균형성이다. 황 교수의 발언 취지도 사실 이 대목이다. 이번 기회에 김연아와 주변 관계자는 물론 교과부, 문화부, 대한체육회 등은 제도적으로 ‘공부하기 어려운 학생 선수’ 상황을 심각하게 성찰해야 한다.
체육 특기자 제도는, 공부할 마음이 전혀 없는 학생은 물론이려니와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도 전혀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특기자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중·고교 학생 선수들은 대체로 교실 구경도 못한 채 경기장에서 귀한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중 열에 아홉은 낙오하고 한두 명이 통과하게 되는데, 그들은 학생이라기보다는 대학의 홍보대사처럼 생활한다. 이래저래 관문을 통과한 쪽이나 그렇지 못한 쪽이나 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생의 절반을 보내게 된다. 이게 정상인가, 김연아와 더불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의 당사자였고 입학하자마자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그 대학 총장이 ‘고대 정신을 팍팍 주입한 결과’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언까지 했던, 김연아라면 이 같은 불균형성을 들어서 잘 알고 겪어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황 교수의 비판이 매우 불쾌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맥락이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할 기회, 친교할 기회, 인성을 쌓을 기회를 제도적으로 박탈해버리는 현 스포츠교육을 비판하려는 것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김연아라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만, 이번 논란이 미래의 김연아를 꿈꾸는 수많은 중·고교 유망주가 공부도 하면서 실력을 쌓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위선양 신드롬’에서 다 함께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김연아는 천부적인 재능과 고결한 노력으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앞으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정점으로 하여 스타 중의 스타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22살의 청년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나이다. 실수와 오판과 격정이 허락되는 나이다. 22살은 무엇인가를 베풀고 이끌어가는 나이라기보다는 이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욕망, 의견을 두루 접하며 더 성장해야 할 때이다.
김연아는 일반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굵직한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젊은이가 겪고 배운 소중한 것을 결핍한 경우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혹시 이 사회가 김연아를 ‘국위선양의 젊은 리더’ 같은 일종의 허위의식으로만 대할 경우 그 끝은 자칫 일그러진 영웅이 추락하는 벼랑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무오류 무결점’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주변의 유혹에 대해 김연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갖고자 했던 문대성의 경우가 반면교사다.
나는 김연아가 이렇게 말하기를 기대한다. ‘황 교수의 발언은 사실과 명백히 달라서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스포츠교육의 기형성을 비판하려는 취지를 이해하여 고소를 취하한다.’ 이것으로 김연아는 법정까지 가지 않고서도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만 덧붙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스포츠교육은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여러 교수님이나 지도자들과 함께 학생 선수들이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한지 찾아보도록 하겠다.’ 이럴 때 김연아는 그 무슨 낯간지러운 ‘한국을 빛낸 스타’ 정도의 저렴한 이미지가 아니라 진실로 스포츠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후배들을 보듬어주는, 진짜 스타가 될 것이다. 그런 스타로서, 그러니까 서푼어치 판타지 스타가 아니라 진정한 역할 모델의 구현자로서 2018평창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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