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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그냥 뚫고 지나가는 것 그게 제일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지나간 뒤에야 저는 애당초 그런 벽이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러니 멈추지 마세요. 계속 달리세요.”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EBS 교육방송 <지식채널>의 객원작가로 참여한 김연수는 이렇게 마라톤을 예찬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매우 함축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해야 했던 까닭에 예찬의 도입부는 싱거운 편이었다. “1000m를 달려보세요. 이제 그렇게 41번만 더 달리면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예찬은 “한 번에 하나씩, 작은 목표를 이뤄가다 보면 언젠가 큰 꿈도 이룰 수 있습니다”로 이어지는데 이런 정도의 권유가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의 목소리라면, 조금 한가로운 것 아닌가 그런 느낌이었다.

 

‘핑크리본 사랑마라톤’ 참가자들 l 출처:경향DB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연수는 방향을 튼다. “앗, 그런데 뭔가 빠뜨렸군요” 하면서 그는 “현실 앞에서 우리 꿈은 보잘 것” 없다는 비극적 인식 아래 다시 마라톤을 이야기한다. 싱거운 권유가 조금은 애틋한 아포리즘으로 바뀐다. 1000m를 한 35번쯤 달렸을 때, 그러니까 35㎞ 지점에 이르면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장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온 우주가 저 하나 완주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밀어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포기, 몇 달 동안의 준비, 다시 달리기. 그래서 김연수는 다시 그 벽을 만나게 되고 “벽을 만나면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벽을 지나가고 나면 애당초 그런 벽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조지 쉬언의 마라톤 예찬론인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번역하기도 한 김연수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어쩌면 평발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오래 걷기도 어렵고 뛰기는 더 괴롭지 하면서 오랫동안 뛰는 일 대신에 맹렬히 공을 차고 열심히 자전거를 탄다. 그 바람에 김연수가 말한 35㎞의 벽을 직접 실감해 본 일이 없다. 다만 축구 후반전 30분쯤, 혹은 한계령이나 죽령의 정상을 자전거로 마침내 기어오르던 기억을 되살리며 아마도 다리가 저 스스로 비틀거리고 심장이 잔뜩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은, 그런 일이 아닐까 짐작은 한다.

일본의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곧잘 언급된다. 한때 그는 마라톤을 20회 이상 완주한 작가로 통했다. 그러다가 2009년도쯤에는 25회 완주 작가로 소개되었고 요즘은 30회 이상 완주했다고 나온다. 미리 써놓은 묘비명처럼 진짜로 그는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라톤은 황영조, 이봉주 같은 선수들을 포함하여 소수의 마니아가 즐기던 스포츠였다. 그러던 것이 한국마라톤협회에 따르면 2010년 한 해에만 약 513개 대회가 개최되고 대략 330만명의 동호인이 활동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그 수가 중장년층 중심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대해 스포츠사회학자 김영갑은 “극기와 자기 통제의 수단으로써 마라톤은 상처 입은 중산층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분석한 바 있다. 소설가 김연수도 2003년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인내하며 결승점까지 들어가고 말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쓴 적이 있다. 사회학자 정준영은 적어도 미국에서 마라톤은 중산층 남성의 “세련된 자기과시 수단”이라고 분석했다. 고급 자동차는 물질적인 과시에 지나지 않지만 마라톤은 시간의 여유와 정신적 여유, 그리고 균형 잡힌 몸매로 성공한 중산층 정서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확실히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허약한 기반을 일거에 드러내고 또한 그것마저 무너뜨린 공포였다. 그 이후 우리 사회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일생 전체가 끝내 물리치지 못할 공포와의 길고도 헛된 싸움”이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란 “끝없는 수색정찰”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신화는 깨졌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개인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까지 위험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지는 사회 현상은 억압이나 배제가 없는 문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갑자기 와인 열풍이 부는가 하면 걸그룹을 좋아하는 삼촌팬도 양지로 나왔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도 아니고 심드렁해지면 그만두면 그뿐이다.

자전거, 요가, 마라톤 등 자기 통제에 따른 강렬한 몰입이 가능한 레저 문화가 급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애틋한 현상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긴박한 생존 상황을 역설한다. 이 과도한 문화적 몰입은 얼핏 폐쇄적인 자기애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정서적 힘이 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달린다. 스스로 내켜서 하는 일이다. 달리다가 힘들면 멈추면 된다. 멈췄다고 해서 사회적 낙오나 실패는 결코 아니다. 하루키는 서른세 살 때 갑자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단박에 출세작을 쓴 후 그것을 평생 동안 하기 위해 담배를 끊고 마라톤에 나섰다. 김연수도 잘 준비된 글감이 빛나는 소설로 빚어지듯이 잘 준비된 과정이 아름다운 완주로 이어진다고 썼다. 아무튼 달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훈수를 두는 것보다 직접 달리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일이다. 달리기에 더없이 좋다는 5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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