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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대한체육회(회장 이기흥)가 자체 혁신안을 발표했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그래도 기존의 관행에서 진일보한 내용들이 적지 않아서 환영할 만하다. 나로서는 국가대표 훈련 시스템의 개편과 체육인 교육센터 설립에 우선 눈이 간다. 문체부 산하 스포츠혁신위원회에서 집중적으로 살피고 힘줘서 권고한 것처럼 국가대표 훈련 시스템 개편은 한국 스포츠가 비로소 20세기를 끝내고 21세기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기존에는 장기 합숙형이었다. 국가대표가 장기 합숙을 하니 그 아래 단위에서도 합숙만이 유일무이한 방법인 것처럼 수십 년을 보내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달렸고 주말에도 산악을 오르내렸다. 신년이 되면 국가대표 선수들은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에까지 뛰어 들어갔다. 국가대표만이 아니라 국가대표가 될지 안될지도 모를 어린아이들도 컴컴한 합숙실로 들어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나 20세기는 저물고 어느덧 21세기 중엽에 접어들었다. 국제 스포츠의 추세가 달라졌고 가치가 변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도 인구 변동과 세대 문화와 젊은 지도자의 대거 등장으로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학적인 시스템, 개방적인 문화, 활달한 세대 감수성이 전제되지 않는 장기 합숙형은 구조적으로 문제를 낳기 마련이다. 실제로 끔찍한 폭력이 빈번히 일어났고 급기야 대한체육회장이 공개 사과를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럼에도 사건, 즉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혁신위는 단기 체류형 개편을 권고하였고 이에 대한체육회도 같은 입장을 천명하였으니, 환영할 일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단기 체류형으로 개편한다는 것은 단지 대표선수들의 선수촌 내 숙박 일수를 줄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도하고 반복적인 연습, 훈련 이외 시간의 통제적인 선수 관리, 성인 선수들의 일상생활 제약과 학생 선수들의 교육권 침해, 새벽부터 밤까지 선수들을 관리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과도한 노동과 무한 책임, 그 때문에 선수들을 더욱더 통제해야만 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단기 체류형으로 한다는 것은 국가대표의 선발과 훈련뿐만 아니라 선수촌 안팎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며 그 요체는 선진적으로 지도하고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경기력을 유지 또는 향상을 위해 과학적인 시스템이 탑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식의 변화, 즉 선수에 대한 존중과 지도자의 전문성 향상이라는 전제들이 필요하며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21세기 중엽에 있어 국가대표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까지 던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제도의 탑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기 체류형은 여러 혁신안 중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혁신안들을 꽉 물고 함께 움직이는 허브가 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사건도 자주 터지고 관리하기도 어려워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일시적 부작용이 또 다른 구조적 병폐로 음습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 밖에도 대한체육회의 자체 혁신안은 한국 체육계 전체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요소가 많다. 인권과 공정성 실현을 위한 징계통합관리시스템을 구축한다거나 회원 단체에 책임과 권한을 대폭 이양해 자율성을 강화하겠다는 점, 그리고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유·청소년 전문스포츠대회 형태로 개편하고 학교별이 아닌 연령별 구분 및 스포츠클럽 등의 개인과 팀까지 참가 허용 등은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 적은 대로, 만시지탄의 안타까움이 있다. 대한체육회로서는 두 번의 중요한 기회가 있었다. 올해 초 관계부처 장관들이 일제히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던 바로 그 상황에서 진지한 사과 이후 과감한 혁신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그러했더라면 8개월 가까이 흐른 지금은 혁신안 제시가 아니라 그중 일부가 현실화되는, 그야말로 미래를 주도적으로 잡아당기는 대한체육회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기흥 회장이 IOC 위원에 선출된 직후인 7월 초다. 이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혁신위의 권고에 공감하며 필요하다면 혁신위원장을 직접 만나는 등 체육 개혁을 위한 대화와 소통의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 또한 여러 이유로 무산되었다. 이 회장의 표현대로 “진정하고 잘 살펴보면 분명히 접점”이 나올 수도 있었으며 실제로 혁신위원회는 그러한 대화의 노력을 다각도로 진행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첨예한 이슈를 갈등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우친 요즘의 언론 환경까지 더해지면서 ‘대화와 소통’은 일시 중단되었다.

최소한의 사무처도 없이 80여 차례의 회의를 지속하며 일곱 차례의 중대한 권고안을 발표했던 혁신위에 비하여 체육회는 인력과 예산과 활용 가능한 유·무형의 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혁신위가 주도하고 체육회가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처럼 보인 것은, 체육회가 두 번이나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만약 체육회가 앞의 두 차례 기회를 선용했더라면 혁신위의 권고는 불필요했으며 아예 출범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혁신위는 활동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대한체육회는 대한민국과 운명을 함께하는 영구적인 단체다. 스포츠의 제1 원칙, 즉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점에 의거하여 지금이라도 체육회는 좀 더 종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편안을 선제적으로 발표하고 그것의 실현, 즉 천천히 오는 미래를 상대방 유도복 깃을 당기듯이 바짝 잡아버리는 공세적인 혁신을 주도하기 바란다. 10월 초에 제100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마지막 기회다. 이 중요한 기회를 공허한 항의나 소모적인 비난으로 채우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진일보하는 체육회가 되길 바란다. 혁신위의 시간은 서서히 끝나간다. 지금부터는 ‘체육회의 시간’이다. 부디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기를.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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