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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때 일이다. 일주일 넘게 아시안게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다가, 가을 햇살을 올려다볼 만한 틈이 생겨 통도사로 바람을 쐬러 갔다. 마침 통도사의 개산대제가 열렸다.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도 있었다. 그해는 대통령 선거도 있던 때라서 2002 월드컵의 인기에 파도타기를 한 정 후보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큰절로 들어섰다. 몇몇은 축구협회 임원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운동장에서 한평생을 보낸 자신이 정치인의 유세 행차에 따라나선 모양을 꽤나 난처해했다.
그랬는데, 스포츠 스타들을 정치의 병풍으로 삼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2008년 3월 말, 18대 총선의 동작을 선거구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는 축구협회의 김정남 울산 현대 감독을 비롯, 부산 아이파크 황선홍 감독, 프로농구 전주 KCC 허재 감독 그리고 2002년의 스타 안정환 선수까지 유세 연단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을 포함해 이회택 협회 부회장이나 김주성 국제부장 등도 비슷한 자리에 함께했는데, 아마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래에 응하다 보면 점점 그 거래의 달콤한 맛, 굳이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없더라도 엄청난 권력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치명적인 착시에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대신에 내가 선택됐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덧 협조 연락이 없게 되면, 아 나는 폐기 처분된 것인가 하고 자괴감까지 들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면 두 번째 소리가 나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누르게 된다. 나는 지금 권력의 작동 방식보다는 이러한 메커니즘에 의해 선수들의 몸과 영혼이 교란되는 상황을 얘기하는 중이다.
2009년 3월21일을 생각해보자. 당시 전남 소속의 이천수는 굴욕적인 징계를 받고 홈구장에 들어섰다. K리그 홈 개막전에서 심판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날리는 바람에 이천수는 3중의 처벌을 받았다. 6경기 출장정지, 제재금 600만원 그리고 페어플레이 기수라는 사회봉사활동 처분 말이다. 특수부, 강력부, 마약부 등을 거친 전직 검사 출신의 K리그 상벌위원장은 두 개의 징계로도 부족한지 이천수로 하여금 페어플레이 깃발을 들고 서 있도록 했다. 전남 팬들은 ‘선수인격 무시하는 X 같은 연맹’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선수가 겪는 치욕적 상황이 팬들에게도 모욕의 순간이 됐다. 구단 직원들이 달려와 항의 깃발을 철거했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천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페이플레이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하여 이천수는 ‘개과천선’을 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협회가 선수에게 필요 이상의 과잉 징계, 그것도 의자 들고 복도에 나가 서 있으라고 하는 식의 인신 모욕적 징벌을 내린 것은 K리그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박태환 선수가 무릎을 꿇었다. 지난 5월2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태환은 “수영선수는 수영장에서 성적·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앞서 4월28일에 박태환을 지도하고 있는 노민상 전 국가대표 감독이 제자의 올림픽 출전을 소망한다며 무릎을 꿇은 바 있다. 스승이 무릎을 꿇은 지 4일 만에 박태환 선수도 무릎을 꿇었다.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2014년 9월 도핑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후 박태환은 악전고투 끝에 주요 네 종목에 걸쳐 국제수영연맹(FINA)이 정한 A기준 통과 기록을 작성해 리우올림픽 출전 자격을 갖춘 상태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후 3년이 지나지 않은 자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미해진 상태, 결국 무릎을 꿇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왜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박태환의 소속팀 인천시청 구단주인 유정복 인천시장은 “박태환의 명예회복과 국위선양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했다. 노민상 전 감독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왔으며 박태환도 이날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국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박태환에게 다른 말을 하는 사람, 다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 다른 삶을 권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다음 선수권 대회도 있다고, 입상만이 모든 게 아니라고,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선수 생활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지도자의 길도 있고 방송의 길도 있고, 대학원으로 진학해 자신이 세운 위엄 있는 기록의 학문적 의의를 탐구할 수도 있다고, 이렇게 다른 권유를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인가.
대한수영연맹과 대한체육회는 좀 더 일찍, 좀 더 확실하게,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든가 아니면 모든 가능성을 확보하든가 하여 선수가 전전긍긍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 감독을 비롯해 박태환과 가까운 사람들도 박태환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자신들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박태환 자신도, 극심한 모순적 상황이 부여하는 심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국위선양’의 허망함에 기대지 말고 다른 차원의 삶까지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박태환의 아름다운 유영을 보면서 기뻐했던 팬들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며 그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기꺼이 성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미 수차례나 ‘국위선양’을 한 선수가 바로 그 맹목에 볼모가 되어 국가를 향해, 국가의 체육 정책을 주무르는 사람들을 향해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는, 부끄럽고 가슴 아픈 상황이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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