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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 현대의 새로운 예술, 곧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신성과 제의로서의 전통 예술이 지녔던 ‘아우라’가 상실된 이후, 현대 예술의 운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고전과 낭만의 유럽 전통 문화를 어릴 적부터 배우고 익힌 20세기 초반의 뛰어난 예술 사상가들은 영화와 같은 새로운 예술을 짐짓 경멸했는데, 거의 유일하게 벤야민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영화의 ‘추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 연장과 단축, 확대와 축소’에 주목했으며 인류가 영화를 통해 비로소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런데 벤야민이 시각예술로서의 영화, 그 가능성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 나아가 거대한 스펙터클 문화 자체에 내장된 위험성까지 직시했다. 그가 유명한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탈고하던 1930년대는 히틀러 파시즘이 독일을 확실히 장악한 다음이었다. 벤야민이 나고 자란 곳, 그의 지적 영혼의 뼈와 살을 형성해준 도시, 곧 베를린은 히틀러 파시즘의 거대한 극장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는 히틀러의 끔찍한 상징물이 내걸렸고 거리마다 파시스트들의 구호와 행렬이 넘쳐났다. 도시 전체가 파시즘의 광기어린 스펙터클 극장이었다.

벤야민은 영화의 가능성과 함께, 영화 혹은 영화적인 거대한 스펙터클이 도시 전체를 광염으로 물들이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면서 급기야 인류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썼다. 동시대 사상가인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위기의 시대에 날카롭게 대응하려는 ‘브레흐트적 모티프’를 지지하면서도 과연 영화가 예술의 혁명 혹은 혁명의 예술이 될 것인가를 깊이 회의할 때, 그리하여 이른바 문화산업론 비판을 통해 영화나 스포츠 같은 대중문화가 억압과 기만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무렵, 벤야민은 이 명민한 선배 사상가에 반대하면서 영화의 가능성을 탈취해 도시 전체를 광기어린 극장으로 만들어버린, 화려하고 거대한 스펙터클로 ‘파괴의 쾌락’을 개봉해버린, 히틀러 파시즘의 ‘정치 심미화’를 비판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때문이다. 도시 전체를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 벤야민의 경고를 지금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한류 스타쇼’에 불과했다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이번 아시안게임은 수많은 문제점이 매일같이 드러난 대회였다. 매일 크고 작은 소동이 빚어졌다. 이는 대규모 대회를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찰과상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는 이런 대회가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지역의 정치적 풍향에 따라 부풀려지고 급기야 시민 없는 대회, 정체성이 상실된 대회, 오직 극단적인 화려함과 스펙터클을 추구하는 대회로 일관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 개회식만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지난 몇 해 동안 인천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느꼈던 통절한 마음이다. 아시안게임과 관련된 국가주의적 구호와 관변단체들의 공허한 현수막들이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얼룩지게 했음을 나는 수년 동안 목격했다. 자발적 시민 대신 동원된 군중만 요구한 대회였다.


▲ 만성적자 시달리는 인천
국가주의·상업주의 휩쓸려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 유치
그 통에 오랜 역사·문화 희생


한때 ‘창조도시’ ‘브랜드화’ ‘관광 활성화’ 등의 말이 크게 유행해 우리나라에서도 도시 그 자체를 상품화하는 행정이 크게 성행한 적 있다. 그 파고가 드높았을 때 평창(동계올림픽), 인천(아시안게임), 대구(육상), 영암(F1), 청주(조정) 등에서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도시를 바라보는 세계적인 추세도 바뀌었고 지역 민심도 변했으며 따라서 지자체의 전략도 부분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도시를 거대한 스펙터클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추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치고 병든 도시, 온갖 소음과 불빛으로 인해 신경과민에 걸려버린 도시를 차분한 도시, 소박한 도시, 일상의 풍경이 살아 있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의미있는 변화에 의해 국가주의와 상업주의로 일관하는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는 예전과 같은 관심이나 호황을 누리기 어렵게 되었다.

이 변화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할 마음조차 없었던 인천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오랜 역사와 문화와 삶이 살아 있는 항구 도시를 요란한 구경거리로 화장하고 온갖 호들갑스러운 쇼로 덕지덕지 분장만 해버렸다. 급기야 스펙터클 그 자체도 실패해버린 개회식이 되었다. 요컨대 현대 도시에 대한 성찰이 부재했고 화려한 스펙터클의 위험성에 대한 사유도 결여된 대회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전 세계적 추세와는 동떨어진 대회가 되고 만 것이다.

거대한 스펙터클은 제대로 구현하지 못해도 큰 문제지만, 제대로 구현되면 될수록 더 위험해진다. 화려한 조명은 도시의 다양한 삶을 지워버린다. 귀청을 뚫을 듯한 불꽃쇼는 도시의 현재적 운명과 미래의 불투명성을 어둠 속으로 밀어넣는다.

어디 인천뿐인가. 온 나라가 스펙터클에 취해 있고 온 도시가 선거 때마다 내세운 장밋빛 구호들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오랜 역사와 문화와 삶을 싸구려 물건으로 내다파는 풍조가 온 나라에 만연하니 며칠 큰 대회를 치르고 나서 도시 자체가 부채로 허덕이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를 성찰하지 못한다면 평창이든 그 어느 도시든 겨우 며칠의 스펙터클을 위해 역사와 문화와 삶 전체를 장터에 내다파는 희생만 거듭 치르게 될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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