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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2017 대한민국 체육인대회’가 열렸다. 각종 자료와 인터넷 영상으로 제공된 대회장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간절하였다. 과거에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들 모여서 대회를 한다는 것은, 4열종대로 서서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오른팔을 크게 흔들면서 결의하고 맹세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이고 게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국면이다. 스포츠 단체와 선수들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자립하여 자생할 수 있는 기회, 스포츠 용어로 쓴다면 ‘위기 뒤의 찬스’이며 가히 전방 압박을 통해 거침없이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외칠 수 있는 상황이다.
몇몇 그러한 요구가 있었고 그런 요구들의 현실적 근거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대회 현장의 분위기 또한 팽팽했다. 이를테면 이 대회를 통해 제기한 주요 사안 중 ‘체육지도자의 열악한 처우와 체육시설 개선’은 참석자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현실의 문제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실 이 부분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체육계의 숙제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심상정 후보가 “체육인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과 훈련 환경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한 점, 그리고 유승민 후보가 “스포츠 강사들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을 통해 반드시 정규직으로 만들겠다”고 한 점, 또한 문재인 후보가 “생애주기별 맞춤형 스포츠를 확대하고 생활체육 지도자를 확대 배치하겠다”고 한 점 등은, 이제 이 문제가 체육인들이 내부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특수한 조건의 이해나 그 상황의 해결은 반드시 그 행위의 일반적 원칙에 의거하여 접근해야 한다. 그동안 체육인들의 현실 여건은 바로 그 ‘체육’이라는 함정에 갇혀 있었고 ‘선수’라는 덫에 걸려 있었다. 그들의 행위가 일반적 의미의 노동이라는 점, 따라서 노동자에게 필수적인 안전한 노동 환경과 안정적인 생활 조건 그리고 이러한 점이 미비되거나 침해되었을 때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여럿이 결사를 맺어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체육이라는 육체적 함정이 강요하는 독특한 위계질서와 선수라는 정신적 덫에 의한 국위선양 등의 강요된 ‘정신 승리’가 체육인들의 자립과 자결을 막아왔다.
이 점에 근거하여 복기할 때, 이번 체육인대회의 발언과 결의 사항은, 예전처럼 4열종대로 모여 힘차게 구령을 하는 식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났기에 다행이지만, 체육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조건을 보편적 사회 행위의 기반 위에서 객관화하고 이를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관철시키려는 지적 탐색이 아쉬웠다.
체육인대회가 무슨 학술대회나 워크숍은 아니지만 체육 유관단체 관계자, 일선 지도자, 초등학교 스포츠강사 등 2000여명이 모인 현장이라고 한다면 왜 체육이 국민의 ‘기본권’인지를 ‘선언적’으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천명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적폐청산과 스포츠생태계 복원’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혔어야 한다. 결의문 낭독 이후 학자 세 명이 ‘공정한 스포츠 생태계’ ‘스포츠의 경제·사회적 가치’ ‘차기 정부 체육정책’에 대해 발표를 하였고 이로써 이 대회가 과거의 체육계 집합 문화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증명했지만 그래도 ‘2% 부족한’ 대회였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하여 체육계가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체육계를 들쑤신 박근혜 정부의 권력은 막강하였고 최순실의 계략은 주도면밀하였으며 김종 전 차관은 액션 그룹의 행동대장처럼 체육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국정농단’은 곧 ‘체육농단’이었고, 체육인들의 땀방울이 표적이었고, 국민의 혈세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충분한가. 이렇게 지적하고 나면 모든 것이 ‘클리어’해지는가. 그렇지 않다. 체육계의 ‘적폐’는 권력과 이인삼각 달리기를 해온 기존의 구태 인사들과 낡은 구조 안에 잠복되어 있는 상황이다. 어제는 이쪽으로 또 내일은 저쪽으로, 하면서 노회한 기술과 전략으로 늘 힘센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것이 체육계의 현안 해결 방식인 양하면서, 실은 먹이사슬의 상층부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들, 그에 대한 단호한 반성과 개혁적 단절이 없고서는 각종 구호와 결의는 선언으로 그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냉철한 평가다. 그동안 체육계를 지배해온 구조와 인사와 예산과 정책들, 그리고 체육인들의 노동 조건, 고용 관계, 훈련 시설 그리고 무엇보다 억압적인 위계 문화 등을 전면적으로 살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육계가 스스로를 무슨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는 별개의 영역인 양 생각하는 기존의 인식이다. 이 사회의 평균적인 상식이나 규범에서 벗어나 있긴 하지만 그것은 독립적이거나 주체적인 문화라기보다는 상식 이하의 폭력적 위계가 엄연하고 일반 규범의 수준에 미달하는 폐쇄적인 관행이 작동한다. 이 ‘특수한 상황’을 하나의 독립적인 문화라고 강조하는 것, 다시 말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다. 여기에 권력이 작동하면 온갖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체육계가 사회 일반의 상식과 규범을 빨리 내면화하고 구조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짧게 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가 체육계 자정을 위한 절호의 기회다. 길게 보면 ‘국위선양 금메달’이 아니라 체육이 ‘국민 기본권’으로 요구되는 현황이 또한 중요하다. 유력 후보들 모두 낡은 인사와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체육계를 응원한다. ‘금메달 따서 국위선양하겠다’는 얘기에 호응하는 후보는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없다. 자정 없이 자결 없고 자결 없이 자립 없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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