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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놀라운 단순성에 의하여 일찌감치 세계화되었다. 우선 장비가 단순하다. 정규 경기가 아닌 이상 공 말고는 장비가 없어도 무방하다. 지금 이 순간 지구 어디선가 공을 차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아마도 고급 축구화나 정강이 보호대 같은 장비 없이 공을 쫓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기후의 장애도 거의 받지 않는다. 추운 곳에서나 더운 곳에서나 공을 찬다. 규칙도 단순하다. 꼬마 아이들도 손으로 공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것쯤은 잘 안다.


축구 규칙은 17조에 불과하다. 절반은 축구장 규격이나 선수단 구성 같은 것이다. 나머지도 선수와 심판이 아닌 이상 몰라도 축구를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일종의 제도와 자유의 모순 관계랄까, 규칙이 많아지면 그만큼 억제되는 측면이 많다. 규칙이 단순하고 그것마저도 심판의 재량으로 신축적이라서 축구의 원시적 에너지는 비등점을 향해 펄펄 끓는다.


그래서 한번 상상해본다. 만약 국제축구연맹(FIFA)이 나더러 축구 규칙 가운데 어느 하나를 자유롭게 적용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상의 탈의 위반’을 느슨하게 하고 싶다. 축구장 규격 같은 형식이나 오프사이드 같은 내용은 축구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므로 먼 훗날 은하계 리그가 벌어지거나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의 월드컵 참가가 허용될 때까지는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골을 넣은 감격에 못 이겨 상의를 잠깐 벗는 정도는 유연하게 해도 좋지 않을까.


현재는 상의를 가슴께까지 들어올려 펄럭이는 정도만 허락된다. 머리를 완전히 감싸거나 아예 벗어버리는 것은 경고를 받는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종종 상의를 벗어던진다. 골을 넣은 기쁨! 그 애틋하고 간절한 열정이 이성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상의를 벗어던지며 발산된다. 특히 경기 막판에 터진 결정적인 골을 터트렸을 때 그의 자아는 완전한 해방에 이른다.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리그나 대회가 끝나는 것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김보경(카디프 시티)과 기성용(선덜랜드)이 그런 세리머니를 한 적 있다. 지난 11월25일, 김보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후반 46분에 동점골을 넣은 후 상의를 벗어버렸다. 12월18일에는 선덜랜드의 기성용이 캐피털원컵 8강전에서 첼시의 막강 수비진을 흔들면서 종료 직전에 골을 터트린 후 유니폼을 벗어버렸다. 두 선수 모두 경고를 받았지만, 온몸의 세포가 완전히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순간에 ‘아, 상의를 벗으면 경고를 받지’ 하고 차분해진다면 그는 차라리 인간이 아닐 것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12월6일, 터키의 축구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터키 명문 갈라타사라이에서 뛰고 있는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공격수 디디에 드로그바가 상의를 벗어버렸다. 동료 에마뉘엘 에보우에와 함께했다. 경기가 다 끝난 후에 벌어진 일이다. 안에 입은 셔츠에는 넬슨 만델라에 대한 추모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드로그바는 ‘고맙습니다 마디바(만델라 존칭)’라고 썼고 에보우에는 ‘편안히 잠드세요 넬슨 만델라’라고 적었다. 이를 본 수아트 킬리치 터키 체육부 장관은 “터키의 대외적 이미지와 표현의 자유라는 면에서 건전한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고 이에 터키축구협회는 두 선수에 대해 징계를 하겠다고 말했다.


리버풀에 승리한 첼시의 드로그바가 유니폼 상의를 벗은채 환호하고 있다,(출처 :AFP연합뉴스)


세계 축구계의 비판에 못 이겨 결국 철회하긴 했지만 터키의 체육부 장관과 축구협회는 두 가지 점에서 오히려 축구 규칙과 정신을 위반했다. 첫째는 설령 경기 후에도 상의 탈의 금지 규칙이 적용된다 해도 그것은 심판의 몫이다. 심판의 권한은 90분의 경기뿐만 아니라 그 전후 과정에도 관여한다. 그러니까 경기 후에 누군가 상의를 벗었고 그 안에 어떤 문구가 적혀 있어서 이를 문제 삼고자 한다면 경고, 즉 옐로카드를 주면 될 일이다. 둘째는 그들의 행위가 과연 징계를 받을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땀에 전 유니폼을 벗는다. 상대 선수들끼리 기념으로 나눠갖기도 한다. 게다가 그 안의 셔츠에 적혀 있는 문구는 정치적인 표현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 세계가 만델라를 추모하는 분위기 아니었던가. 심지어 만델라의 정신에 어긋나는 신념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도 하나같이 거인의 삶을 추모하는 상황이었다. 드로그바는 잔인한 내전을 겪고 있는 조국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표팀 경기가 열릴 때면 “제발 이 기간만이라도 총을 내려놓자”고 호소한다. 실제로 몇 해 전에는 휴전이 된 일도 있다. 만델라의 유언을 축구장에서 실현하고 있는 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철회하긴 했지만 터키 당국과 축구협회는 두 선수의 행위가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만델라라는 이름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만델라의 힘에 의하여 철회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축구장이 현실 정치와 날선 이념의 격전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어떤 기준으로 봐도 마땅히 기억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최소한 존중이라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면 안되는 것일까. 그 정도의 존중도 두려워하는 곳이 있다면 오히려 상의 탈의 규칙을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가 축구를 할 때만이라도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잠깐이나마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표정으로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저 공을 닮은 해를 보며, 그런 상상을 해본다.


정윤수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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