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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스포츠를 주도하는 정념은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다. 국가주의가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로 드러났다면 가족주의는 섬세하고 끈끈한 힘으로 나타났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은 채 소치의 상공을
선회하다가 특정한 국면에 따라 번갈아 등장하기도 하고 한 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연아 선수를 ‘대한민국의 딸’ 혹은
‘우리 연아’라고 호명할 때,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는 한 몸이었다.
대
규모 국가대항전인 올림픽에서 이러한 감정 상태는 비단 우리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차르 푸틴’이 이끌었던 러시아
대표팀의 성과는, 올림픽 기간에 불거진 우크라이나 사태와 맞물리면서, 거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전리품이 되었다. 다른 나라 선수들
역시 자국 국기를 몸에 감거나 동료들과 얼싸안기도 했으니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결합이 우리만의 독특하거나 왜곡된 정념이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에게 그 정념이 과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개인의 행위와 태도 결정에서 가족을 제일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가족주의라고 한다. 이 건조한 설명을 좀 더 냉정한 현실에 대입해
보면,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상태에서 개인의 생활과 생존이 오직 가족 집단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 유지되는 상황을 가리킬 수 있다.
피상적인 관찰로 보면, 이러한 성격의 가족주의는 전통 농업사회의 유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급격한 산업화에 따라 형성된 핵가족의
지나친 응집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물의 표면을 스케이팅한 것에 불과하다. 문학평론가 권명아씨는 한국전쟁 이후의
공포스러운 무사회(無社會) 상황에 따른 불안한 생존게임을 가족주의의 원인으로 꼽는다. 사회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공동체는 가족밖에 없었던 상황 말이다. 그 무사회 상태를 대체한 것이 박정희 군사정권이 되는데, 이때 국가는
확대된 가족이 된다. 독재자는 지엄한 아버지가 되었고 대통령 부인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그 시절의 잔영이 지금까지 일렁거릴
정도로, 막강한 국가주의와 섬세한 가족주의가 결합했다. 이때, 개인은 충용스러운 국민이자 말 잘 듣는 자식이어야 했으며 그때
비로소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했다.
그 견고한 결합이 느슨하게나마 해체된 사건이 1997년의 외환위기다. 국가와 가족이 견고하게 결합해온 한국 사회가 이 사태에
이르러 붕괴의 조짐을 보인 것이다. 국가와 거대 회사는 자신들의 위기를 개인에게 전가함으로써 ‘평생 가족’이라는 신화를 스스로
박살냈다.
만약 이 사태 이후 우리 사회가 좀 더 우애로운 연대의 길을 모색했더라면 오히려 쓰디쓴 약이라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공습과 허약한 사회안전망, 그리고 중산층 문턱에서 좌절해버린 박탈감이 뒤엉키면서 가족주의는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야만 상태로 언제든지 추방당할 수 있다는 공포의식이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를 사로잡았다. 우애와
연대의 길은 가로막혔고 온 가족이 수색 정찰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과잉된 교육열은, 그 결과가 우선 중요하지만, 내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는 심리적 만족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부풀어올랐다.
소치 올림픽 때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를 응원하고 있는 가족과 시민들.(출처:경향DB)
▲ 소치서 메달을 딸 때마다
TV는 가족들을 비춰준다
먹먹한 눈으로 울음을 참는 그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이러한 사회 정서가 스포츠에서도 나타났다. 아니, 사회의 일반적 규범이나 시스템에 비해 대단히 폐쇄적이고 허약한 스포츠에서는 더 강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골프 대디’나 ‘사커 맘’ 같은 말이 성공한 선수들의 부모들을 가리키며 쓰여지기 시작했는데, 사실 유명 스타는 물론이고 무명의 선수들 역시 온 가족의 처절한 희생 속에서 운동을 해왔다. 성공한 선수들 뒤에는 어김없이 만사를 제쳐두고 운동하는 자식 뒷바라지에 나선 부모가 있었다.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박승희 선수가 소속된 화성시청 빙상팀의 터무니없는 사건에서 보듯이, 가족이 나서 장비를 구입하고 훈련을 해결하는데 조직은 꼼수를 부려가며 선수들의 땀으로 빚어진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곤 했으니, 어쩌겠는가, 믿을 것은 역시 가족밖에 없었다.
스포츠계에서 유독 두드러진 현상이 우리 사회 전반에도 엇비슷하게 나타난다. 국가도 조직도 동료도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가족만이 만경창파의 일엽편주 위에 불안하게 있는 상황이다. 향약이니 두레니 하는 공동체의 규약이나 우애는 완전히 사라졌고 아예 마을이니 이웃이니 하는 말도 현실성이 없어진 지 오래다. 생활, 복지, 교육, 인권 등 마땅히 국가가 책임지거나 사회가 함께 맡아야 할 일을 오로지 가족이 부둥켜안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소치 올림픽을 보았다.
화면에서는 연신 국가주의와 가족주의가 결합된 말들이 쏟아진다. 이는 비단 게으르기 이를 데 없는 방송 관계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딸’ ‘맏형 리더십’ ‘우리 연아’ ‘막내답게’ 같은 말들은 한 세대 동안 전승되어온 스포츠 국가주의의 잔영이자 최근 10여년 동안 거칠게 경험한 가족주의의 파생물이다.
소 치에서 메달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자식들의 쾌거’다. 화면은 가족들을 비춰준다. 열악한 환경에다 온갖 비리와 파벌, 부상과 슬럼프의 고통을 함께 치른 부모들이 먹먹한 눈빛으로 울음을 겨우 참는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초상화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사람들이 빛바랜 국가주의 구호와는 서서히 작별을 하면서도 여전히 애틋한 마음으로 밤새 경기들을 지켜봤던 것은, 그 선수와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이나 외로움을 우리 모두가 이 잔인한 사회에서 10여년 동안 겪어왔기 때문이다.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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