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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동아대학교가 있다. 여러 학과에 걸쳐 두루 실력을 인정받아 온 대학이지만 특히 체육과 관련해 전국적 차원의 실력과 지명도를 가진 대학이다. 그런데 바로 그 대학의 운동장이 주차장으로 급변했다. 학교 측은 서구 구덕캠퍼스에 있던 예술대가 승학캠퍼스로 옮기면서 주차난이 심각해져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고 다른 곳에 같은 규모의 인조잔디 운동장을 새로 조성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별일 아닌 듯 말하고 있지만, 실로 중요한, 단지 대학 체육의 위기만이 아니라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중차대한 문제다.

이런 일이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실외 농구장은 신축되는 아트홀 때문에 철거됐다. 농구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악기 조율이나 연습에 방해가 된다는 게 이유다. 고려대는 공학관 신축을 위해 테니스장을 현장사무실로 전용했고 서강대는 실외 농구장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있다. 중앙대나 서울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드넓은 캠퍼스는 오간 데 없고 오밀조밀한 유리 건물들만 들어서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을 파생하게 된다.

우선 체육이라는 신체 활동에 대한 편견의 확산이다. 체육 활동은 기껏해야 공부하다가 스트레스를 푸는 사소한 행위로 축소된다. 체육은, 그러나 그 자체로 오랜 역사와 미학이 내재된 학문이자 활동이다. 공부나 연구보다 하위에 있는 게 아니라 동렬에 있다. 스트레스를 푸는 게 운동의 전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운동은 그 자체 내에 심미적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어김없이 그 장소로 가게 되어 있다. 땀 흘리며 지쳐서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볼 때 ‘나는 살아 있다’는 충일감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농구하는 데 방해되니 공부는 저 외딴 곳에 가서 하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공공성의 훼손이다. 대학과 그 공간은 국공립이나 사립을 막론하고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다. 특정 분야나 인물의 소유가 아니라 대학 구성원, 나아가 인근 주민들까지 함께 활용해야 하며 그렇게 하라고 일정하게 지원도 나오는 장소다. 학생이나 주민들에게 선심 쓰는 곳이 아니라 원래 학생과 주민들의 공유 공간으로 기능하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들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며 주민들이 산책하고 학자들이 사색할 때, 캠퍼스는 진실로 아름답다.

그런데 건물 신축이나 그에 따른 주차난을 이유로 그나마 한 줌 여유가 되었던 공공의 장소를 특정한 이익에 부합하도록 축소시키면 대학의 장소적 공공성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수익성이 치고 들어온다. 옛날에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들고 잔디나 벤치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학생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대학은 공공의 장소가 아니라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은 주눅이 드는 신분 차별과 문화 차별의 냉혹한 정글이 되고 있다. 운동장은 돈 안되는 학생들 대신 적지 않은 주차비를 지불하는 차들로 채워진다. 수익성이 캠퍼스를 장악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적 접촉의 상실이다. 야외 체육 공간을 없앤 대학들은 대체 공간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대개는 실현되지 않는데 더러 그 약속이 지켜졌다 해도 큰 건물의 지하나 캠퍼스의 후미진 곳이다. 운동을 하려면 후미진 곳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 순간 그것은 고독한 트레이닝이 되고 만다.

굳이 5억달러 가치의 체육시설을 갖춘 조지아대학교를 언급하지 않겠다. 재학생 중 95%가 수영, 농구, 배구, 복싱을 하는 버지니아주립대학교의 엄청난 시설도 언급하지 않겠다. 앤아버 인구 11만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미시간대학교의 스타디움도 언급하지 않겠다.

그저 한 줌이라도 좋다. 손바닥만 해도 좋다. 그러나 반드시 캠퍼스의 중심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야외 운동 공간이 있어야 한다. 캠퍼스 중심에서 공을 찬다는 것은 그 일대의 모든 사람이 함께 공을 찬다는 뜻이다.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도 생의 자극이 된다.

학생들이 왜 운동을 하는가? 누군가 지켜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선이 교차하고 몸이 섞이면서 인간적 접촉이 증가하면 사랑도 싹트고 심지어 학문의 융합도 이뤄진다. 같이 뛰어도 돼요? 물으면 금세 숫자 맞춰서 뒤섞여 뛰는 게 캠퍼스의 운동이다.

철저히 관리되는 첨단 건물의 폐쇄된 연구실에서는 학문의 융합이 이뤄지지 않는다. 후미진 곳의 고립된 운동도 비인간적이다. 동경의 시선도 없고 사랑의 눈길도 없이 냉혹하게 승부만 겨룰 뿐이다. 엄격하게 시간 제한을 두고 일정하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대학의 연구를 방해하고 학생들의 사랑을 파괴한다. 이런 비극이 따로 없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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