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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문재인 대통령은 진천선수촌을 전격 방문한다.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설득하려는 취지였다. 올림픽 직전이라 당시 진천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국가대표선수들을 모아 격려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 선수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감기몸살이라고 둘러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4년 ‘은사’(고마운 스승이라는 뜻이다)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의 폭행으로 선수촌을 이탈(실상 탈출에 가깝다)한 사실이 알려졌다. 기록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수촌 내 골방에서 무차별 폭행이 가해졌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스포츠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인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선수촌에서 나온다?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맞아서 죽을 것 같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린 선수가 홀로 겪어야 했던 수치심과 모멸감은 도무지 실감하기 어렵다. 심석희 선수는 주 종목인 1500m에서 예선탈락을 했고 마지막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결정짓고 펑펑 울었다. 우리는 이제야 그 눈물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만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이 없었다면? 혹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정에 없는 진천방문을 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 쇼트트랙 주장선수였던 피해자가 선수촌을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상습상해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지난 9월, 징역 10월을 선고받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는 이제 성폭력 혐의를 추가로 받고 있다. 심석희 선수가 직접 재판에 나와 엄벌을 호소했던 지난 12월17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강간상해 등의 혐의로 조 전 코치를 추가 고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심 선수는 2014년(당시 고등학생이었다)부터 올림픽 직전까지 4년간 지속적 성폭행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돌아보면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여제자 성추행 사건이 터졌고 바로 그 빈자리에 조재범 코치가 장비 담당 코치로 선임됐다. 우리는 성추행 사건으로 자리가 생겨 들어간 그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체육계 성폭력이 조재범이라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 쌓여온 소위 구조적인 문제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방증이다.

어린 선수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지도자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훈련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선수가 꿈꿀 수 있는 미래는 오직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목표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창시절 동안 운동만 해온 선수는 이제 운동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이것밖에 할 게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선수가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느낄 때 지도자는 그가 배워 온 유일한 지도방법인 폭언과 구타를 사용한다. 간혹 심하게 때린 날에는 따로 자신의 방으로 불러 직접 피멍이 든 몸에 파스를 발라준다. “네가 미워서 때린 게 아니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다”라며 달랜다. 이렇듯 체육계 성폭력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견디는 폭력과 맞물려 있다. 혹 몹쓸 짓을 하고 마음이 안 놓일 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시킨다며 겁을 주면 된다. 유도 유망주이던 2011년 고교 1학년 때부터 2015년까지 유도부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해 3월 경찰에 고소하고 최근 언론과 인터뷰를 한 신유용씨도 “(성폭행 당시 코치가) ‘누군가한테 말하면 너와 나는 유도계에서 끝’이라고 협박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때 피해자인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가슴에 묻고 침묵하든가 혹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내든가. 침묵을 선택하면 평생 그들의 가슴이 멍들고, 발설을 선택하면 그들의 인생이 망가진다. 코치의 위협은 공갈이 아닌 실재였던 것이다.

선수생활을 그만둘 각오를 하고, 성폭행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 해도 이후 겪어야 할 시간은 혹독하다. 얼마 전 만난 전직 체조협회 간부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나의 질문에 두 시간 내내 눈물만 흘렸다. 사건이 발생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약 좀 구해주세요.”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발설을 택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침묵을 택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다양한 형태의 2차 피해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주위의 시선도 싸늘하다. 가해자는 당당하게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하고 피해자는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다. 법의 심판을 호소해도 경찰, 검찰, 그리고 사법부의 대부분인 남성들은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지난해 사회 전 영역에서 미투의 광풍이 몰아칠 때 유독 스포츠 분야는 조용했다. 선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코치와 감독,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인 합숙소와 훈련장,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묵인, 방조 심지어 공조하는 침묵의 카르텔까지.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에 최적화된 체육계 관행과 성문화가 오히려 이번 사건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스포츠계의 미투에 무수한 미(Me)만 존재하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투(Too)가 없었던 까닭이다. 

한 가지 더 뼈아픈 지적을 하자면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에 대해 우리 모두가 일종의 공범이라는 점이다. 올림픽 메달은 선수들이 일상적으로 겪은 비정상적인 훈련 과정을 덮고도 남았다. 국민들은 열광했고 올림픽 메달순위에 집착했다. 지난해 문체부 감사를 통해 파벌과 체벌로 멍든 빙상연맹의 관리단체 지정을 권고하자 빙상계 원로들이 연판장을 돌리면서 저항했던 논리가 바로 이거다. ‘올림픽 때 메달 따줬는데 뭐가 문제냐?’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낸 심석희 선수의 고발이 스포츠계 미투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더 이상 체육계에 성폭력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발본색원하길. 만약 이번에도 체육계 폭력과 성폭력을 뿌리 뽑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피눈물 흘리는 선수를 만나야 할 것이다.

<정용철 | 서강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문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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