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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지금 나는 1년 전의 내가 아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말이다. 그는 ‘뉴스위크’ 최신호 칼럼에서 ‘1년 전’의 사고 이후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음을, 조금은 상투적으로, 그러나 나름 절실하게 적고 있다. 그는 기이한 열정의 연쇄사슬과 그에 따른 불화와 파경을 ‘1년 전의 자동차 사고’라고 함축하여 말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지만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뒤늦게라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타이거 우즈는 ‘자동차 사고’ 이후 “아들을 목욕시키는 것이 골프 공을 한 바구니 더 치기보다 훨씬 낫다”거나 아이들에게 “파스타를 만들어주는 일이 최고급 식당의 식사보다 보람 있다”고 말하는데, 매우 진부하지만, 최고 수준의 인위적 삶에서 추락하여 뒤늦게야 가족의 한 사람이 된 그로서는 충분히 할 만한 말이다.

하긴 타이거 우즈 역시 우리처럼, ‘60억명 중의 1인’일 것이다. 그가 경쟁을 통해 남는 기록이야 언제든 깨어질 뿐 “우리 삶에 영구히 남는 건 가족의 사랑과 다른 사람의 존중”이라고 말할 때, 숙취에서 간신히 깨어난 자를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는 한 그릇의 콩나물국 앞에서 우리 또한 숙연히 깨닫는다. 한 해의 종착지로 달려가는 이때, 올해의 인상 깊은 경기들을 통하여 그 같은 소박하면서도 비범한 가치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싶다.

우선 김연아의 눈물이 떠오른다. 지난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녀는 수년 동안 혹독하게 조련된 자신의 육체를 4분 7초 동안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녀의 몸은 중력을 비웃었고 원심력과 구심력의 자장을 맘껏 유린하였으며 고도의 절제된 힘으로 흡사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자유로운 비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울었다.

동작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울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금메달이 확정되고 나서 울음을 터트린 게 아니라, 더 이상 점프하거나 회전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4분 7초가 다 소진되었을 때, 그녀는 울었다. 그 끈끈한 액체는 메달이나 우승 같은 현실적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새 지평 위에 올라섰다는 경이로움과 오랜 짐을 이제야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깊이 모를 허탈감의 표현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출신 투수 가운데 최다승을 기록한 박찬호의 눈물 또한 기억할 만하다. 윤종신의 노랫말처럼, 박찬호의 눈물 역시 “수분과 염분과 그리움이, 추억과 다툼과 서러움”이 방울방울 맺혀져 있다. 그와 같은 눈물을 올해 수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저마다의 링 위에서 흩뿌렸다.

박주영의 눈물은 어떠한가.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0-1로 패하였다. 이로써 금메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박주영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의 병역 혜택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후 치러진 동메달 결정전. 놀랍게도 한국 대표팀은 후반 막판,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란을 물리쳤다.

금메달보다 귀한 동메달?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종료 직후 터져나온 박주영의 눈물은 그 같은 표현이 결코 근사한 역설법으로 포장된 상투적인 격려가 아님을 입증했다. 박주영은 펑펑 울고 나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소중했던, 어떤 최초의 경험을 다시 한번 느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맨 처음 공을 차보았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을 때, 처음 승리했을 때 혹은 처음 패배했을 때. 마치 첫사랑처럼 최초의 상태로 돌아간 것. 금메달이니 동메달이니 하는 현실의 가치나 무게가 아니라, 맨 처음 그라운드에 섰을 때 느꼈던 축구장의 경이롭고도 신선한 공기를 다시 맛본 상태, 그런 일순간의 고결한 상태에서 박주영은 눈물을 흘렸다.

연말에 혹시 우리도 눈물 한 방울 흘릴지 모를 일이다. 마이크를 붙잡고 악을 쓰는 동료의 목덜미의 팽팽한 근육을 보면서, 추운데 어서들 들어가라며 훌쩍 택시에 오르는 상사의 뒷모습에서, 숙취를 못 이겨 새벽에 겨우 일어나 냉수 한 사발 마시고 불현듯 바라본 고요하여 텅 빈 듯한 거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맨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틀림없이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될 것이다. 그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의외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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