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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2008년 말 국가인권위원회는 ‘운동선수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체육중·고교에 재학 중인 남녀 학생 1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서 무려 78%의 학생선수들이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놀라운 것은 언어적 성희롱(58%)과 강제추행(25%)을 포함해 63%가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한국여성스포츠회는 석달 전 세미나를 열고 이 실태조사가 현실을 오도했다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성폭력의 피해는 여성에게 심대할 수밖에 없을 텐데 여성들이 나서 조사결과가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더니 지난달엔 이 단체의 부회장이자 여자농구의 영웅 박찬숙씨가 “부풀려진 체육계 성폭력 실태 바로잡아야”라는 칼럼을 한 신문에 기고했다.

성폭력이란 개인 의사에 반한 언어적, 시각적, 신체적인 성적 행위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포괄하는 개념인데 지금도 그 범위는 계속 확장 중이다.
그런데 조사결과에 따르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언어적 성폭력 외에도 신체 특정부위를 만지고 옷을 벗기는 등의 성추행을 무려 25%가 경험했다. 생각해 보시라. 이들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폭력에 노출된 청소년 집단이 또 있을까.

궁금한 건 박찬숙씨 등 여성체육계의 태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 사실이 가급적 많이 알려지길 원한다.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이 달려와 구출해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많은 운동하는 여학생들이 언어적, 신체적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데도 박씨는 “잘못된 편견으로 이를 확대하고 부풀려서는 곤란하다”고 한다. 박씨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조사결과의 신뢰성을 문제삼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우리나라 운동하는 학생들이 외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본질을 가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한쪽엔 대한체육회, 다른 한쪽엔 나이 어린 피해선수들이 있는데 왜 박씨와 여성스포츠회는 체육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가. 칼럼의 결론으로 여성 지도자의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하기를 촉구했던데, 만약 이것이 시행된다면 그 수혜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왜 희생당하는 어린 여자선수들에 대한 고민과 주장은 없는가.

대한체육회는 사회적 비판도 받았고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로 호되게 고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철저한 반성과 함께 이러한 폭력적인 운동환경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먼저 아닌가. 그럼에도 조사결과가 과장됐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문제의 세미나는 대한체육회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스포츠회는 대한체육회와 함께 ‘정확한 실태조사’를 다시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체육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 개념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그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년 체육회가 발행한 ‘선수폭력 예방 리플렛’이 밝힌 ‘아래의 경우는 폭력이 아니에요’의 내용이다. “서로 장난치면서 가볍게 치는 것, 단순한 욕설, 물건을 훔치는 것, 상대방에게 입힌 상처가 매우 가벼워 치료할 필요가 없으며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자연히 나을 수 있는 정도인 경우”는 폭력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장난’치면서 병원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로만 패면 폭력이 아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폭력은 범죄”라 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지도자의 허락을 받고, 지도자가 있는 자리에서 합니다”라는 문구다. 도대체 정확한 실태조사가 가능이나 하겠나.

박찬숙씨는 ‘그릇된 조사’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스포츠를 포기할 수 있고 이는 여성스포츠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나의 결론이다. 첫째, 아주 제대로 된 조사였고 둘째, 여성스포츠의 미래보다는 어린 청소년 선수들의 미래를 먼저 걱정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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