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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시절, 깐깐하다고 소문난 어느 재판장이 검사를 혼낸 이야기다. 공판에 참여한 검사가 무료했던지 시도 때도 없이 볼펜을 손에 쥐고 촉을 내밀었다 들였다 하면서 딸깍 딸깍 소리를 냈다. 재판장이 정리(현재의 칭호는 법정경위다)를 부르더니 검사를 가리키며 일렀다. “어이, 정리, 저기 저 볼펜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 있잖아, 법정 밖으로 내보내게.” 그 검사, 얼굴이 벌게지더니 다시는 그 짓을 못했다고 한다.

얼마 전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 사건의 심리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오해를 피하려고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내가 그 사건에서 주목하는 것은 검사의 항의나 주장, 판사의 대응과 판단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따위가 아니다. 형사사법의 운영과 관련하여 보이는 새로운 경향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작년 12월21일자 사설은 공소장 변경이 허가되지 않은 후 검사들이 법정에서 벌인 항의를 “전대미문의 법정 활극”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의 방점은 활극이 벌어진 사실이 아니라, 그 활극에서 재판장이 결코 검사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데 두어야 한다. 문제는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당사자가 누려온 지위의 불균형성에 있다.

형사소송에서는 검사와 피고인(및 그 변호인)이 형사소송에서 가지는 지위가 대등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져 왔다고 할 수 없다. 문제의 활극이 벌어진 날 공판에 참여한 검사는 “재판장이 검찰의 의견을 이렇게 받아주지 않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했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검사의 그 발언은 틀리지 않다. 변호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 전형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 정경심 사건에서 보인 재판장의 소송지휘였다. 신기하다.

한편으로 전임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에서는 법원이 피고인 측의 온갖 증거신청에 대해 일일이 증거조사를 해 주고 있다. 피고인 측의 그런 주장과 입증이 가지는 정당성 여부는 일단 접어두고, 법원이 이에 대해 일단 진중한 심리를 해 주는 모습은 솔직히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반의 사건에서 피고인이나 변호사가 검찰이 제시하는 증거에 대해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다면 판사가 뭔가 제동을 걸지 않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을 터라서 하는 말이다.


검사가 가장 싫어하는 무죄판결

2018년 무죄판결 비율은 0.79%

무죄율이 낮은 데서 알 수 있듯

지금까지 판사의 일반적 성향은

이른바 적법절차형 모델보다는

범죄진압형 모델에 가까웠다


형사사법사무 중 수사와 공소유지와 형의 집행을 검사가 맡고 있다면, 판사는 수사와 공판 단계에서 검찰권 행사를 통제하는 것이 제도의 기본 틀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유례 없이 검찰의 권한이 큰 우리나라에서 과거 법원의 통제가 만족스러울 만큼 잘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건 처리에서 검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영장 신청에 대한 기각과 무죄 판결인데, 2018년 기준으로 구속영장의 발부율은 81.3%이고 제1심 형사판결 중 무죄 판결의 비율은 0.79%다. 무죄율이 이리 낮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판사의 일반적 성향은 이른바 적법절차형 모델보다는 범죄진압형 모델에 가까웠다. 그러던 법원이 윤관 전 대법원장의 취임 이래 형사사법절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해 온 일이 영장실질심사제의 실시와 공판중심주의·구술변론주의의 실질화였다. 그러나 변호사의 눈으로 볼 때 법정의 운영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정경심 사건에서 검사가 항의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주의였다. 이것은 검찰이나 경찰에서 만든 조서가 맞는지 틀리는지 따지는 식의 재판이 아니라, 유죄인지 무죄인지의 판단을 법정에서 피고인이나 증인 등 사건관계인이 하는 말을 기본으로 삼아 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 원칙은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우리 형사사법이 여기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수사기록은 던져 버리라”라던 발언이 충격적으로 들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위법수집증거 배제 원칙의 적용 확대, 기소 후 증인에 대한 조사의 증거능력 제한, 영장 청구에 대한 엄격한 심사 등 검찰권 행사에 대한 법원의 통제는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법원은 새 정부 들어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피의자나 참고인으로 불려가서 검찰의 조사를 받는 미증유의 체험을 거친 후 종전과는 다른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법원의 재판이란 것은 불가피하게 그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낳지만, 판사는 그런 해석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이른바 정무적 판단이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정도다. 흥분해서 자꾸 일어서는 검사에게 담당판사가 했다는 그 말, 그래서 신선하다. “검사님, 앉으세요.”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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