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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매키는 이름난 병원의 잘나가는 외과의사다. 행복한 가정과 고급저택을 가지고 있다. 유능하지만 환자의 고통에 냉담한 그가 어느 날 후두암에 걸렸다.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환자로 신분이 바뀌자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검사를 시행하는 의사는 불친절하고 일방통행이다. 병원은 방사선 치료 시간을 지키지 않고, 간호사에게 따져보지만 여의치 않다. 무신경, 무성의, 무대응에 분노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병원 관계자는 없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병원에,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의사가 절망한다. 1991년에 나온 미국 영화 <더 닥터>의 줄거리다.
어떤 전문가는 그의 전문지식을 구하는 소비자의 말에 둔감하다. 아예 외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직업적 판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쁜 태도는 냉소와 비웃음이다. 입원 전의 잭 매키는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레지던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외과의사가 남의 살을 찢는데 무슨 감정을 갖나?”
나는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 출마 예정자가 됐던 일이 있다. 판사 재직 중이던 1995년 어느 일간신문에 내가 집권여당 소속으로 모 지역구에 출마하려 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다른 신문이 인용하면서 근 한 달간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지인들로부터는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도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답만 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해당 정당의 조직국에서 자료가 나왔다는 거였다. 책임자인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자료를 흘린 일이 없다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판사님, 참 이상하시네요. 남들은 그런 데 이름을 못 올려 안달인데, 왜 그걸 싫어하세요?”였다.
생각다 못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다. 사무원의 퉁명스러운 응대는 그렇다 치고, 변호사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이거, 사건이 됩니까?”였다. 된다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변호사가 “판사가 된다면 되겠지…”라고 하더니, 그 정당 대표자의 대표권을 어찌 증명할 것인지 물었다. 정당은 법인이 아니라서 등기소에서는 증명서를 받을 수 없다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글쎄,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본 일이 없으나 한번 신청서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소송이란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다음날 더욱 기막힌 일이 생겼다.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와, 요즘 이런 사건을 하다가는 바로 세무조사로 보복당할 수 있다고들 하니 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직 판사가 되어서도 법적 구제를 받기가 이리 힘든데 보통 사람은 어떨까 싶었다.
의사, 성직자, 법률가, 교직 등 전문직 종사자가 환자, 신자, 소송 당사자나 의뢰인, 학생 등을 상대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공감해 줄 마음을 갖지 않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가 상대하는 이들은 자기의 고충을 호소하면서 때로 떼를 쓰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엉터리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를 이르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나 교과서에서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윤리칙이 중요한지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답안에 옮겨 점수를 따고, 그 점수로 자리와 밥을 얻어 안온한 일상에 들어가고 심지어 높은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다 보니, 어느덧 바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 재미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직업적 소명에 대한 자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제는 내면화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망각하면, 즉 역지사지라는 이름의 위대한 상상력을 잃으면, 그 순간 전문직 종사자는 본래의 책무를 저버리고 사회적 사명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전문직이 적어도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권력자라고 함에 동의한다면, 모든 권력자에 대한 경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권력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 볼 줄 아는 것이다.
법정에서 가장 힘이 빠지는 순간은 담당 판사의 태도가 냉담할 때다. 변호사 된 지 얼마 안돼 형사사건 법정에 처음 들어가서 겪은 일이다. 항소심 재판장이 심리에 앞서 다들 들으라면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신청할 수 있으며 아무튼 1심 법원에서 못했던 주장이나 입증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끝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나중에 피고인 측 주장이 허위거나 증거조사가 불필요했다고 밝혀지면 형이 가중될 테니 그건 각오하라. 순간 법정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싸였다.
전직 판사였던 어느 변호사가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이 된 후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몸소 피의자, 피고인이 되어 보고 나서야 적법절차, 무죄추정원칙, 증거재판주의, 피의사실 공표 처벌 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왜 이제야 뼈가 저린가. 뼈가 저리기 전에 마음가짐을 점검했어야 할 일 아닌가. 높은 법대에 앉은 이들이여, 간절히 비노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선언을 진실로, 진실로 가슴에 새겨 보라. 시간이 없다. 어느 날 법대에서 내려오면 늦다. 그때 당신은 이미 판사가 아니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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