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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전서>의 존재, 그리고 청대 학자들의 저작이 조선후기 곧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본격적인 것은 18세기다.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조 문인들은 <사고전서>를 본 적은 없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고전서총목제요> <사고전서간명목록>을 통해서 그것이 거대한 총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본 적이 없는 책과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저술 형태는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다.

<사고전서>는 규모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떤 원칙에 의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수합한 ‘총서’다. 이 총서라는 것이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예컨대 <한위총서(漢魏叢書)>란 책을 보자. 이 책은 중국 한나라, 위나라의 책을 모은 것이다. 왜냐? 이 시기의 책은 매우 희귀하다. 그러니 한곳에 모아 놓으면 보기 편리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명·청대에 와서 거대한 규모의 총서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김창업(金昌業)이 형인 김창집을 따라 1713년 북경에 갔을 때 강희제는 <연감유함(淵鑑類函)> <전당시(全唐詩)> <패문운부(佩文韻府)> <고문연감(古文淵鑑)> 등 모두 370권을 하사한다. 이 책들은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설명하기 복잡하니 생략하고 <전당시>만 간단히 살펴보자. <전당시>는 1705년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된 당시(唐詩) 전집이다. 수록 시인은 2200명, 수록 작품은 4만8900편이다. 어떤가? 끔찍하지 않은가?

이렇게 명·청대에 와서 어떤 의도하에 다량의 자료(곧 책이다)를 총서의 형태로 집적하는 것이 유행했다. <사고전서>도 그런 총서 중 가장 사이즈가 큰 것일 뿐이다. 실제 ‘총서’란 이름을 달고 있는 책 중에서 조선조에 알려진 것만 대충 들어도 <야객총서(野客叢書)> <격치총서(格致叢書)> <당송총서(唐宋叢書)> <소대총서(昭代叢書)> <단궤총서> <기진재총서(奇晉齋叢書)>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총서’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지만 책의 성격이 ‘총서’인 경우가 더 많다.

총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꽃에 관한 총서를 내고 싶다면, 가능한 한 광범위한 책을 읽고 거기서 꽃에 관한 자료만을 뽑아서 ‘백화총서(百花叢書)’라는 제목으로 엮을 수도 있다. 이런 총서류는 18세기 후반 조선에 엄청나게 유입되었던 것 같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위서(僞書)>, 곧 ‘가짜책’이란 이름의 문제를 출제한다. 핵심 구절을 들어보자.



‘또한 자칭 신서(新書)의 명가라는 자들은 잡가(雜家)·소설가(小說家)·총서가(叢書家)·예완가(藝玩家) 등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이런 책들이 심신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 것이며, 나라에 도움이 되겠느냐?’

아무것도 아닌 말 같지만, 음미해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당시 북경에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책이란 것이 도대체 심신의 수양과 국가의 경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총서’도 비판의 대상에 올라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여러 문헌에서 자료를 잘라내어 어떤 주제하에 모으는 저술 형태 역시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정조 당시까지 조선 지식인의 저술 형태는 중국과 사뭇 달랐다. 일정한 주제를 정하고, 광범위한 자료를 집적하는 그런 형태의 저작은 없었던 것이다.

주로 성리학, 그것도 주자의 저술을 정밀하게 음미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을 종으로 횡으로 다시 편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학문적인 내용이라고 해 보아야 편지에서 이루어지거나, 다른 사람의 문집에 붙이는 서발문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명·청대 지식인들의 굉박한 저술, 그리고 <사고전서>와 같은 편집서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지식인도 총서를 기획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종채가 아버지 연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모아 쓴 <과정록>을 보면, 연암은 중국과 조선의 문헌 가운데에서 조선과 외국의 교섭에 관련된 책자를 선발해 <삼한총서(三韓叢書)>란 거창한 총서를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연암은 실제 작업을 진행해 20, 30권 정도의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과정록>은 178종의 문헌 이름을 적어 두고 있다.

비슷한 기획은 이덕무도 시도한 바 있다. 이규경은 <소화총서변증설(小華叢書辨證說)>에서 조부인 이덕무가 이의준(李義準)과 서유구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경익(經翼)·별사(別士)·자여(子餘) 등 세 분야에 걸쳐 <소화총서>란 제목으로 조선 지식인들의 저술을 모으려 했다고 한다. 그 책에 들어갈 목록의 일부가 위의 <변증설>에 실려 있다. 물론 책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실제 이런 작업을 수행한 사람도 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들어 시험조로 처벌을 받은 유일한 인물, 그러나 끝내 문체를 고치지 않았던 이옥(李鈺)의 절친 김려는 이옥의 작품을 거두어 모았다. 곧 그가 엮은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이옥의 작품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이다. <담정총서>의 ‘총서’ 역시 중국의 ‘총서’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데 김려가 엮은 총서가 <담정총서>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조가 남긴 필기류 산문을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140권, 70책), <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책수 미상), <광사(廣史)>(200책) 등으로 엮었다.

아마도 김려는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필기류 산문을 집대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고관외사>와 <창가루외사>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광사>는 일제강점기 시라토리 야스키치(白鳥安吉)에 의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 때 재가 되고 말았다. 저주받을 일제여!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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