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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19세기의 ‘자매문기(自賣文記)’란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부모의 장례를 치르느라 빌려 쓴 돈을 갚기 위해 자신과 딸을 얼마의 돈을 받고 누구에게 노비로 판다는 문서였다. 이 문서를 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이 자신을 팔다니! 또 부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관(冠)·혼(婚)·상(喪)·제(祭) 등 유가의 의례(儀禮)가 산 사람을 노비로 만들 정도로 압력이 되었던 사회가 눈에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도대체 사람이 예를 위해 존재하는가, 예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고문서 중에 ‘고풍(古風)’이란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지방으로 가는 현감·군수 등 지방관의 자리는 360개쯤 된다. 그들이 발령을 받을 때 대궐 안에 있는 발령에 관계된 문서를 꾸민 말단 관료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관례다. ‘고풍’이란 문서는 그 돈을 보내고 받은 영수증이다. 지방관은 쉴 새 없이 교체되니, 말단 관료들은 지방관보다 수입이 짭짤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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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렇게 돈을 보낸 지방관들은 부임 뒤 돈을 벌충하기 위해 틀림없이 백성을 쥐어짰을 것이다. 이처럼 한 장의 고문서는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정확한 사회상을 온전히 드러낸다.

조선은 문서의 나라였다. 토지문서, 호적문서, 관청 간의 행정문서 등 국가 경영은 문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지금 엄청나게 많은 문서가 남아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예컨대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곳에서 열심히 모으고 자료집을 내기도 하지만, 아마 그것은 실재했던 고문서의 10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문서의 99%는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의 도서관은 고문서를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고, 또 그런 고문서만 소장·관리하는 기관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런 고문서만을 모아서 제공하는 기관이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학생들을 데리고 가을이면 답사를 간다. 졸업할 때까지 3차례 참여해야 하고 돌아오면 보고서를 써서 내야 학점이 나간다. 전국을 4권역으로 나누어 다니니,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면 어지간한 유적지는 거의 보는 셈이다.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도 즐겨 찾는 곳이다. 18세기 말부터 조선을 흔든 천주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배론으로 가서 황사영(黃嗣永)이 숨어 ‘백서(帛書)’를 쓴 곳을 보았다. ‘백서’는 비단에 쓴 글이다. ‘백서’ 복제본을 파는가 싶어 물었으나 없었다. 예전에 샀던 복제본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다시 구입하려 했던 것이다.




‘백서’의 내용과 중요성은 여기서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관심이 있는 것은 ‘백서’가 발견된 내력이다. ‘백서’는 원래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문초하던 관서인 의금부(義禁府)에 있던 것이다. 황사영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기에 ‘백서’ 역시 증거물로 의금부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의 관제가 완전히 바뀌자 당연히 의금부도 없어졌고, 의금부 문서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문서를 폐기하던 중 좀 유별난 문서가 하나 보였다. 곧 ‘백서’다. 이것이 결국 천주교 관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결국은 로마교황청까지 흘러갔다.

고문서가 허망하게 폐기된 것은 의금부만이 아니었다. 전근대의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고, 국가와 사회의 제도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으니 과거 관청의 문서들이야말로 한 푼어치의 값도 없는 것이었다. 폐지로 팔린들 누구 하나 아까워하지 않았다. 호적, 토지문서 등 사회경제사의 기본 자료가 되는 문서들은 어디로 갔는지 어느 날 사라지고 만 것이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순탄하게 이루어졌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실제 일어나고 만 것이다.

또 광복이 되고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남은 문서와 전적은 제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단은 전쟁을 낳았고, 그 전쟁은 문서와 전적에 거대한 재앙이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던 곳을 탈출하는 판에 어찌 책이며 낡은 문서를 챙긴단 말인가. 피란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문서며 책이 모두 사라졌다. 1910년 식민지가 되었을 때보다 더한 재앙이었다. 이어지는 세월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50년대, 1960년대 먹고살기 팍팍한 시절 책은 뒷전이었다. 수많은 책과 문서가 종이 재생공장으로 사라진 것이다.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 기생관안(妓生官案)이란 한 쪽짜리 문서가 있다. 어떤 고을의 기생 이름을 모아놓은 문서였다. 지방관아에서 기녀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 같았다. 평소 여성사에 관심이 있기에 이 문서가 보고 싶었다. 그 대학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에 중간에 사람을 넣어 문서를 복사하려 했지만, 뭐 귀중본이라나 뭐라나 안 된다고 했다. 귀찮은 것이겠지! 또 그게 귀중본인 이유도 모르겠지! 이런 거절은 워낙 많이 당해본 터라, 별로 섭섭하지도 않았다.

요즘 말끝마다 문화 콘텐츠니 콘텐츠 사업이니 하는데 정작 그 결과물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실상 많은 사업은 그냥 돈 나눠먹기 경연장 같다. 엉뚱한 곳에 나라 예산 퍼붓지 말고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고문서나 한곳에 모아 분류하고,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려주면 좋겠다.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어야 좋은 문화 콘텐츠가 개발될 것이 아닌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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