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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말이 났으니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보자. 정조는 <사고전서>를 구하려다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했다. 정조가 어떻게 <사고전서>의 존재를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과연 <사고전서>의 규모를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사고전서>는 운반하기조차 쉽지 않은 거창한 총서이기 때문이다.

한 질의 <사고전서>는 그 자체로 도서관이다. 지금 영인본 <사고전서>에는 ‘문연각사고전서(文淵閣四庫全書)’라는 이름이 책 앞에 붙어 있는데, 문연각이란 <사고전서>를 보관했던 건물이다. 엄청나게 큰 건물이니, 그 자체로 도서관인 것이다. <사고전서>가 얼마나 대단한 총서인가는 그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수록된 책은 약 3500종, 권수로는 8만권쯤 된다. 1741년 천하의 책을 모두 모으라는 건륭제의 명령이 내려졌고 1771년 그 작업을 담당할 관청인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 만들어졌다. 중국 천하의 책을 북경으로 옮기고 그것을 읽고 <사고전서>에 넣을지 말지를 판단하고, 넣을 책을 베끼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벌이 완성된 것은 1781년이었다. 앞서 정조가 <사고전서>를 구입하고자 사신을 보냈던 때가 1776년이니,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였다. 이어 열하(熱河)의 문진각(文津閣), 북경 원명원(圓明園)의 문원각(文源閣), 자금성의 문연각, 심양의 문소각(文溯閣)에 간직한 4벌, 그리고 민간의 3벌 등 모두 7벌이 만들어졌다.

이런 거창한 사업의 배경은 단 한 가지로 압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거대한 총서의 편집 의도를 헤아리기 바빴다. 무엇보다 청이 한인을 지배하게 되자, 한인들의 사상을 검열하기 위해 이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그 결과 청 체제에 저촉이 될 만한 책들은 모두 솎아내 따로 목록을 만들었으니, 역시 설득력 있는 견해다. 한편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한인 지식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거창한 지식사업을 벌였다는 견해도 있다. 지식인이란 책을 주어 놀게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법이 아니던가. 수많은 책을 읽고 베끼는 과정에서 무슨 딴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사고전서> 이면에는 강남에서 발달한 고증학이 있다. 고증학자가 북경으로 진출해 거창한 총서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양휘웅 옮김, 생각의나무, 2009)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궁금하면 이 책을 보시라. 어쨌거나 <사고전서>는 그것이 청인의 명령에 의한 것이든, 사상 통제의 결과물이든 현재 중국을 대표할 만한 거창한 문화재가 되었다.




내가 <사고전서>를 처음 본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서다. 연구원 쪽이 대만과 어떤 협정을 맺었는지 중국 책을 잔뜩 기증받았는데, 거기에 <사고전서>가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사이즈의 영인본이 서가를 한없이 채우고 있었다. 그 서가 앞에서 나는 문득 가보지도 않은 만리장성을 상상했다. 시간이 흐른 뒤 만리장성 위에 섰을 때 나는 다시 <사고전서>를 떠올렸고 나의 상상력이 그리 허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사고전서>는 그런 책이다.

아무리 광적인 독서가라 할지라도 <사고전서> 전체를 읽을 수는 없다. 또한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애서가라 할지라도 <사고전서>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한문으로 쓰인 데다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도 많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처럼 전공이 한문학이면 이 책을 정말 불가피하게 보아야 할 경우가 생긴다. 십수년 전 어떤 책을 집필하고 있을 때다. 명나라 문인 왕세정의 문집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어떤 어휘를 찾고, 그 어휘가 담긴 글을 찾아 읽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책을 쓸 수가 없었다. 왕세정이 남긴 글을 읽어보면 될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게 간단치 않다.

왕세정은 저술을 많이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문학, 비평, 예술,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을 소개한 책이 문고본 1권이다. <사고전서> 외에 이 사람의 문집을 볼 수 있는 데가 없다. 도서관에 가서 확인했더니 끔찍한 양이었다. 열댓 권이나 되는 무거운 책을 혼자 들고 올 수가 없어 학생들의 손을 빌려 겨우 연구실로 끌고 왔다. 이제부터 보는 것이 일이다. 하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도 내가 찾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약 2만면을 세 번이나 훑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헛수고만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왕세정에 대해 꽤나 많이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책을 내고 난 뒤다. <사고전서>가 디지털화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즉시 구해서 검색해 보니, 내가 원했던 바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와 관련해 다시 떠오른 생각! 책을 읽으며 내가 원하는 내용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사고전서>는 어마어마한 책이다 보니, 내가 찾고자 하는 책이 영인본 몇 권에 실려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어떤 분이 노고를 거듭해 <사고전서>에서 책을 찾는 색인을 만들었고 그것을 이용했지만, 그 책이 나오기 전에는 책 자체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사고전서>의 디지털화로 이제 <사고전서>를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자료가 검색된다는 데 있다. 이게 연구자에게 엄청난 작업량을 던져준다. 또한 검색된 자료는 원래의 컨텍스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어떤 맥락에 있는 자료인 줄을 모른다. 그러니 어떨 때는 <사고전서>가 한국에 없던 시절, 디지털화하지 않았던 시절의 책 읽기의 우매한 노동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곤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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