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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위안부 합의가 28일 체결 1년을 맞는다. 합의대로라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했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그 같은 과정을 밟고 있어야 맞다. 현실은 정반대다.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은 회복되지 않았고 마음의 상처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지금 할머니들은 서글픈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합의가 최선이라며 수용을 강요하는 한국 정부가 상대다. 가해국인 일본 정부를 뒤에 가리고 나선 꼴이다. 주객전도도 유분수지, 할머니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정부를 대리해 설득에 나선 건 김태현 화해·치유재단 이사장이다. 지난달 있은 김 이사장과 한 할머니의 1시간20분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김 이사장이 설명한다. “일본 정부가 그동안 인정 안 하던 일본군 관여를 인정했어요.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반성했어요. 말만 한 거면 사과한 게 아닌데 그 책임으로 10억엔을 지원했어요. 할머니 명예회복하고 존엄하게 남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치유하는 사업 하라고 보냈어요.” 거짓과 왜곡이 들어 있다. 위안부 합의문에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라고만 돼 있다. 어디에도 일본군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저지른 전쟁범죄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또 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반성한다고 말만 했을 뿐 실제로는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았다. 일본이 사죄와 반성의 책임으로 10억엔을 보냈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합의문에는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한다’고 돼 있다. 이후에도 지원금이라고 표현했다. 법적 책임 성격이 담긴 배상금이라고 밝힌 적은 없다. 할머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10억을 준다 한들 청춘이 돌아오겠어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평화의 소녀상 뒤에 선 참가자들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창길 기자

김 이사장의 회유가 본격화한다. “할머니들 만나보면 그러세요. 나는 누구보다 더 일본 잘 안다, 일본이 이거보다 더 사과 안 한다, 이거보다 더 돈을 안 낸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도 나는 사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세요.” 돈을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답변은 간결하고 핵심을 찌른다. “천번 만번 말했단들 직접 와서 하지 않았으니 그게 어디 사과야?”

김 이사장이 좀 더 분명하게 의도를 드러낸다. “제 생각에는 살아 계실 때 돈을 받고 사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거지 돌아가신 뒤엔 일본은 해주지도 않아요. 일본이 그래도 사과하겠다 반성하겠다 또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인정도 하고 정부 돈으로 주겠다고 했으니 그건 사과 의미가 있거든요, 책임 있다 인정한 거죠. 그렇게 생각하시면 신청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90살을 앞둔 할머니의 처지를 이용해 덫을 놓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말려들지 않는다. “근데 나는, 지금 일본에 대해 소송을 건 것을 모르십니까?”

김 이사장의 어조가 강해진다. “이제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사과 표명을 했고 돈 준 것은 이제 시작이에요. 받을 건 받아야죠. 사과 표명한 거라도 받아야죠. 일본은 아무리 끌어봤자 더 이상 돈 안 줘요. 한국에서도,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도 압박을 넣고 있고, 정부도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아베가 와서 사과하라고요.”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합의 후 한국 정부는 일본에 진심 어린 사과를 압박하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위안부 백서 발간사업을 중단하고, 유네스코 등재 추진사업 예산은 전액 삭감했다.

이제 담판은 단문단답식으로 오간다. “가시기 전에 한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하자 “그런다고 한이 풀리겠어요?”라고 답하고, “너무 딱해요, 자꾸 입원들 하시고”에는 “일본이 좋을 거야 다 죽으니까. 정부도 그렇고”라고 응답한다. 이에 김 이사장이 “정부는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하니 “박근혜가 아베를 몇 번이나 만났는데 이걸 하나 해결 못하고”라고 맞받는다. 김 이사장이 “아베가 그렇게 지독한 사람이에요”라며 정부를 옹호하자 “엄청나게 노력한 게… 돈 몇 푼 받는 거요?”라고 응수한다. 대화는 “안 받은 분들 신청서 다 받아 가지고 오면 내가 생각해보겠다”는 할머니의 말로 마무리됐다.

할머니는 단단했다. 화려한 언변은 없어도 김 이사장의 능란한 화술과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다. 돈을 받으면 할머니들의 존엄과 인권, 여성성을 유린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더 이상 문제 삼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귀 어둡고 판단력 흐린 90살 안팎 할머니들을 비공개리에 1 대 1로 만나는 정부의 꼼수가 통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소추 후 “피눈물이 뭔지 알겠다”고 모진 말을 해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사죄편지 요청에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망언해도 다 참아낸다. 할머니들은 28일 올 마지막 수요시위를 연다.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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