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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체육대회의 남북 공동입장과 한반도기 사용, 단일팀은 모두 보수 정권이 시작했다. 첫번째 단일팀인 남북탁구팀이 구성된 것도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1년 일본 지바 세계수권대회에서다. 당시 단일팀이 ‘만리장성’ 중국을 꺾고 우승하자 보수 언론은 “남북단일팀이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고 대서특필했다. 사실 평창 올림픽 여자 하키 단일팀을 가능케 한 평창올림픽특별법도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주도했다. 이 밖에 박근혜 정권 시절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한반도기를 흔들며 북한 여자축구를 응원한 것이나 북한이 인천 아시안게임에 응원단을 보내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전세기를 북한에 보내자고 한 것도 새누리당이었다. 그랬던 보수 세력이 지금 와서 평창 올림픽의 북한 참가에 대해 마치 한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단일팀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영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를 떠올리게 한다. 집단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보수 세력의 이런 증세는 기억상실증과 거리가 있다. 기억상실증은 어떤 이유로 인간의 뇌가 기억을 인출해 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보수 세력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기보다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기억을 인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정치 도의를 인출하지 않는 셈이다. 이는 단순한 자기기만을 넘어 평창 올림픽을 망치고 한반도 평화마저 흔드는 위험한 행태다. 이런 정치, 이런 정치가는 국가의 발목을 잡고 퇴행시킬 수밖에 없다.
소집단의 논리에 매몰돼 평창 올림픽 북한 참가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 청와대는 어제 평창 올림픽 엔트리 마감 결과 92개국에서 2900여명이 참가할 것이라며 이는 동계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만일 북한이 불참하고 핵·미사일 위협을 계속했다면 이런 성황을 이루기는커녕 세계가 참가를 꺼리는 올림픽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핵 위기로 참가를 주저하던 유럽 국가들이 북한 참가가 확정되자 참가 쪽으로 돌아선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조차 한때 안전을 문제 삼아 참가 유보방침을 거론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평창 올림픽의 평화올림픽 개최 목표는 이미 절반 이상 성공한 셈이다.
북핵 사태가 전쟁위기로 치닫고 있는 지금 대북 대응이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는 보수 세력의 주장은 일리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에 어깃장을 놓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 보수 세력은 한반도 전쟁 위기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언행은 그런 인식과 거리가 있다. 현송월 국빈대접 논란만 해도 그렇다. 세상에 버스와 열차에 태워 이동시키는 국빈도 있는가. 본질을 외면하고 지엽말단에 목숨을 걸면 문제제기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선의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통하지 않고는 북핵 해결 논의를 한 발자국도 진전시킬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김정은을 증오하고 거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국가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했다. 그런 그들을 협상장으로 끌어낸 것은 전쟁으로 인해 공멸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역사의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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