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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판사 탄압 의혹이 한창이던 지난주 양승태 대법원장은 신임법관 임관식에서 말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한 사회의 종말이 시작되는 징표’라고 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말은 법관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해서는 안됨을 갈파한 경구로서, 우리 모두 이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젊은 법관 107명이 처음 법복을 입고 들은 ‘대법원장님 말씀’은 과연 사실일까.

이 말은 발자크의 소설 <창녀의 영광과 비참(Splendeurs et misères des courtisanes)>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체 문장은 이렇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한 사회의 종말이 시작되는 징표입니다. 사법부의 현재 관행을 때려 부수고 다른 바탕 위에 새롭게 지으십시오. 하지만 사법부 신뢰를 멈추진 마십시오.’ 현실 사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냉소가 섞인 문장이라고 한다.

파리8대학에서 발자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예영 서울대 교수의 계속되는 설명이다. “발자크는 사법권이 얼마나 권력의 이해관계에 좌지우지되고 부패한 곳인지를 보여준다. 법관으로서의 양심과 명성, 출세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야심, 그리고 권력층의 이해관계와 명예가 얽혀 있어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운 판사의 갈등을 묘사한 이야기다.”

지난 6일 대검찰청의 조각작품 ‘심흔 95-1’을 두고 촬영한 대법원이 과녁에 든 표적물처럼 보인다. 대법원은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양 대법원장(과 그의 비서업무를 하는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하필이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발자크의 소설을 찾아내 인용하면서, 발자크의 말이라거나 경구라고까지 표현한 이유가 있을 테다. 문제는 이들의 원전 비틀기 대상이 프랑스 대문호의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한민국헌법의 핵심 구절을 미묘하게 바꿔가면서 대법원장과 행정처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양 대법원장은 제왕적 인사권을 방어하기 위해 ‘법관의 독립’이 아닌 ‘법원의 독립’을 말해왔다. 이날 임관식에서도 “법관은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원의 구성원”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헌법 101조1항)를 뒤집은 것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제헌헌법에서는 ‘구성된’ 대신 ‘조직된’이었으므로 판사가 법원의 조직원이 된다.

헌법 제5장 법원(101~110조)을 관통하는 핵심은 ‘법관의 독립 보장’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법제처가 발간한 헌법주석서에서는 법관의 독립 상대가 ‘법원 내·외부의 간섭’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법관의 독립’을 ‘재판의 독립’으로 바꾸고, 그 상대도 ‘외부의 부당한 통제’로 축소시킨다. 내부의 통제가 없다는 것인지, 있어도 그만이란 것인지 애매하다.

그리고 양 대법원장은 “‘재판 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 중의 하나로서 우리 헌법도 이를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라고 신임법관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헌법 130개 조항 어디에도 ‘명백하게’ 재판의 독립을 선언한 구절이 없다. 우리 헌법이 선언한 것은 ‘법관의 독립’이며 그 결과가 ‘재판의 독립’인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양심에 바탕을 둔 법관의 독립을 선언한 헌법 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마저 미묘하게 왜곡된다. 대부분 학자들은 ‘헌법과 법률을 기초로 양심에 따라’라고 해석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라고 쉼표 하나를 얹어 법관의 양심을 3분의 1로 깎아내린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거쳐 나온 그의 발언이 이것이다. “법관은 어떠한 외부의 부당한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고 오직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하여야 한다는 ‘재판 독립의 원칙’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 중의 하나로서 우리 헌법도 이를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난 6년 동안 양승태 대법원장의 헌법 해석이다. 종말이 시작되는 징표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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