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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전 일이다. 장교 교육을 받는 중에 부사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막 부임한 소위가 터줏대감 중사에게 휘둘려서 부대원 통솔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을 듣던 터라, 부사관과는 거리를 두고 계급 서열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부사관의 경험을 인정해 주고 호감과 신뢰를 쌓으면 잘 협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은, 물정 모르는 이상론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이들에게 주는 조언에도 아전을 엄하게 단속하고 향반에게 정사를 맡기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다. 지역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향반을 도적처럼, 아전을 원수처럼 여겨서 경계를 늦추지 말고 사소한 허물도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전과 향반도 자신의 마음과 같으리라고 믿으며 유순하게 다스리다가는, 결국 그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수령은 비난을 받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믿음과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은, 역시 물정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18세기 초의 문인 조귀명은 이렇게 진단했다. 뜻이 아무리 좋고, 누가 뭐라 하든 그 뜻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시킬 식견이 없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패했다고 해서 뜻이 잘못되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룰 만한 식견이 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향반의 사람됨을 판단하여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식견, 아전의 사정과 필요를 파악하여 조치해줄 수 있는 식견이 있어야 그들을 향한 인간적인 신뢰가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저속한 데로 치닫기만 하고 좀처럼 진작되지 못하는 까닭은, 저마다 남들도 잘할 수 있는 무난한 것에만 힘쓸 뿐 비난 받을 여지가 있는 일은 피하기 때문이다. 비난을 무릅쓰고 나아가려면 자신의 뜻이 확고하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뜻이 아무리 좋아도 구체적인 식견이 부족하면 그 길이 막힐 뿐 아니라 확신도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시대, 어지럽게 뒤엉킨 여러 문제들을 선한 의도만으로 풀어갈 수는 없다. 비둘기의 순결함에 부디 뱀의 지혜가 더해지기를, 그럴 수 있는 분들이 중용되기를 소망한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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