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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만남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내가 당황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트럼프 노벨 평화상 후보론’이고, 또 하나는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언급된 ‘문재인 대통령 조연론’이다. 일단 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권과 관련한 수많은 유엔 조약을 앞장서서 위반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말세’라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문제는 두 번째 의견이다. 여야 간 정쟁으로 치부하기엔 심각한 사안이다. 국제정치에서 ‘팩실레이터(facilitator)’는 외교력으로 국가 간 갈등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자를 말한다. 촉진자, 조력자, 주동자, 조성자 등의 뜻이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있어서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영향력이든 지렛대(레버리지)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는 ‘강국’이지만,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나 중재력 측면에서는 ‘중견국(middle power)’으로 분류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야당 일각의 “문재인 조연” 운운은 국제정치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거나 흠집 내기이거나, 둘 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45년 미 군정 이후 지난 74년 동안, 우리는 프란츠 파농의 표현대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글자 그대로, 서구가 심어놓은 ‘식민(植民)’이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의 정치, 경제, 일상은 ‘미국’이거나 ‘미국이 아닌 것(북한)’에 의해 좌우되었다. 독재는 쉬웠다. 미국을 욕망하고 동일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친북’으로 몰면 그만이었다. 특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한반도는 미·소에 의한 분단이 아니라 미국이 기준이 된 분단이었다.

분단 체제는 남북 간의 대립이 아니었다. 통치자들에게만 유리한 이데올로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분단을 이용하지 않은 첫 번째 지도자였다. ‘통일’은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다. 현재 남북은 ‘대립하고 있지 않다’. 가난한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관심 없는 타자일 뿐이다.

판문점 만남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조연이라고 했지만, 실제 우리 정부의 역할은 조정자에 가까웠다. 다른 국제 관계에서는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기회가 많지도 않고, 이 분야에서는 주연과 조연이라는 용어 자체가 난센스다. 이제까지 국제 사회에서 주연은 주로 전쟁을 일으키는 침략자들이었다. 주연과 조연의 구분과 위계를 강조하는 사고방식도 시대착오적이지만, 요즘과 같은 ‘관종’의 시대에 주연 강박, 주인공병은 위험하다. 이미 주인공병은 위험 수위를 넘었다. 관심을 받는 방법이 주로 혐오 행위이기 때문이다. 막말이나 혐오가 자원으로 연결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남북관계에서는 남북 당사자론이 있을 수 있고, 한국 정부가 조정자 역할을 할 경우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최소한,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언설인 “강대국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나는 예전에 국방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전문가’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반도가 유사 이래 27번 외침을 당했다는 의견부터 900번 당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했다. 잦은 국경 접촉 사고까지 외침(外侵)이라며, 2000번이 넘는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약소국의 운명’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당나라가 등장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고, 원나라가 부상하면 몽골군이 쳐들어왔으며, 명나라가 등장하니 고려가 멸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등장하니 병자호란이,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더니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식민 지배가 일어났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단순한 외세 환원론으로, 이 글에서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피해를 당해왔다는 깨달음은 중요하지만, 피해 경험이 자신을 정의하는 정체성이 되는 방식은 위험하다. 피해 사실과 피해 의식은 다르다. 피해는 상황적인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피해 의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는 상황을 인식하기 힘들게 한다.

나는 이번 회담이 감격스럽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피해자 콤플렉스를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적, 심리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돈이나 무기로는 살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아류 제국주의 의식이 뒤섞여 있다. 동전의 양면도 아니고 한 모습이다. 자부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열등감이 자부심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끔찍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제무대에서의 주연 - 미국도 불가능한 일 - 이 아니라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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