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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인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호스트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 주최자, 숙주(宿主) 등의 뜻이니 조만간 ‘기생충’이란 영화도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기생충>의 주인공 부부 이름도 기택과 충숙이다. 봉 감독은 근대성, 한국 현대사,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뛰어나게 변주한다. 영화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관된 사유가 있다. 이번 작품 도 그 자장 안에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의 <기식자(Le Parasite)>는 기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기생충(寄生蟲)이 아니라 기식자(寄食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대개 “기생충 같다”라고 표현하지만 기생은 생산성(환경 파괴)을 최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기생’은 오해와 낙인이 많은 단어다. 과거 기생은 여성의 직업이었다. 그들은 놀고먹지 않았다. 기예를 갖추고 일하는 이들이었다. ‘기생충’은 여기에 ‘벌레 충’까지 붙었다. 벌레가 생태계에 기여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인간이야말로 벌레보다 못하다. 맘충, 설명충처럼 한국사회에서 혐오의 접미사가 된 벌레는 억울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생에 해당하는 영어 ‘parasite’는 ‘para’와 ‘site’의 합성어이다. ‘para’는 “옆에, 나란히, 같이” 등의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기생은 타인과 같이 산다는 뜻이다. 숙주와 기식자는 위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같이 사는 사이다. 삶의 주최자는 손님이 필요하다. 숙주도 다른 숙주에게는 기생하는 존재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미셸 세르는 최고의 기식자를 왕(王)으로 보았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포스트 휴먼’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이한 세계를 살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질주가 그것이다. 빈부의 양극화는 건강, 교육, 문화 등 일상은 물론 인생과 자아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당대 국가와 자본의 목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재생산은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데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국가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탈락시켜 국민을 ‘잉여’로 만드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고용의 종말은 필연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논란이 되었던 “좌파 신자유주의”는 모순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비극은 이 폭력적 자본주의 자체는 속수무책이고, 현실 정치는 이 과정의 방식을 얼마나 ‘인간답게’ 다룰 것인가를 둘러싼 속도 조절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작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아베 일본 총리는 자국 영화의 수상을 축하하기보다는 일본 사회의 주변부를 그렸다는 이유로 못마땅해했고, 평소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고레에다 감독은 뒤늦은 총리의 축하전화를 거절했다. 예술이 권력의 선전 도구가 아닌 한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세계를 조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이 없다면 할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예술도 없다. 

<어느 가족>의 자국어 제목은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두 작품 모두 기존의 가족 제도와 양극화 시대를 매개시킨다. 가족은 애초부터 계층 재생산의 핵심이 아니던가. <어느 가족>에서도 일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어느 가족>과 <기생충>은 작품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자립과 의존, 주인과 식객, 시혜와 수혜의 의미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면에서 닮았다. 

통념과 달리, 자립의 상대어는 의존이 아니라 독점이다. 인간 생활에서 완전한 자립은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반대는 독점이거나 고립이다. 지역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가로막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독점이다. 글로벌 경제란 일국 내부의 자본주의 분업이었던 도시-농촌의 위계가 전 세계적 지역 분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각 나라 ‘특산품’의 품목과 경쟁력은 같지 않다. 미국은 무기부터 쇠고기까지 모두를 팔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빈부 격차는 필연적이다. 

작품의 시선은 기생의 약함이나 쓸모없음이 아니라 기존 개념을 질문한다.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기생이 뭐 어때서?” “진짜 기생하는 인간들이 누군데!” “기본소득은 당연해!” 이 시대, 기생은 전쟁의 대안이다. 공존하지 않으면 공도동망(共倒同亡)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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