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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가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다.”

진선미 의원이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여성가족부 장관 내정 인사 중 일부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모권사회가 됐다고들 해요.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갓집 근처에서 살아야 하고, 집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더 크다고 말이죠.” 아, ‘가부장제 이후’란 이런 의미인 것인가? 하지만 과연 이런 일들이 한국 사회가 부권사회에서 모권사회로 넘어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이는 사실 가부장제의 성역할 고정관념 안에서 여전히 육아와 가사가 여성의 몫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돌봄노동을 꽤 공평하게 나눠 하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일 분담의 관리자는 대체로 여성이다. 워킹맘의 휴대폰은 친정엄마, 학원 선생님, 아내의 결정을 기다리는 남편 등의 메시지로 정신없이 울린다.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지명된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이재정 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하지만 모권사회 운운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1990년대 탈권위주의 시대와 경제난을 지나면서 가부장의 권위와 경제권에 의존한 가부장제는 ‘고개 숙인 아버지’의 등장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아버지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니 강력한 어머니가 오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건 가부장제의 성격 조정에 불과하다. ‘강한 아버지 모델’이 가고 ‘남성연대 모델’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구에서는 이미 18세기에 이루어진 전환이다. 그래서 근대의 가부장제를 전통적 부권사회(paternal patriarchy)와 비교해 남성연대에 기반한 형제애 사회(fraternal patriarchy)라고 칭하는 학자도 있다. 서구 가부장제에서 여성혐오 문화는 여전해도 ‘시월드’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이유다(시월드란 결국 시어머니를 관리자로 둔 시아버지의 세계니까 말이다).

이러한 가부장제의 성격 변화는 정치적인 변화와 맞물려서 진행됐다. 린 헌트에 따르면 18세기 유럽인의 정치적 상상력은 가족 구조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지배자를 아버지로 여겼고,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국왕을 ‘국부’, 왕비를 ‘국모’라 부르며 받든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랑스혁명기에 남성들은 국부와 국모의 목을 치고 형제애(fraternity)를 말함으로써 이러한 전통적 가부장제 및 절대주의 왕정과의 단절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과 함께 진행된 것은 가부장제의 성격 변화였다.

그러나 살부(殺父)와 함께 ‘누이 살해’ 역시 진행된다. 이 ‘형제’들이 여성도 주권자임을 주장했던 올랭프 드 구주의 목을 친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광장에서 지움으로써 혁명을 부르주아 형제들만의 역사로 전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강력한 가부장은 사라졌지만, 남성중심적인 여성혐오 문화는 유지된다.

한국과 프랑스의 가부장제를 한 줄에 세울 수는 없지만, 최근 문재인 정권을 보면 18세기 프랑스 격동기를 풍미했던 형제애를 떠올리게 된다.

촛불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끌어내린 것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건재했던 ‘아버지 박정희’라는 신화의 목을 치는 정치적 행위였다. 하지만 여전히 권력자가 되지 못했다는 불안에 떠는 ‘형제’들의 여성혐오는 더욱 강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는 남성 원팀 정치가 시작됐다. 예컨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단 한 명도 여성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지 않았다.

다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형제애는 ‘브로맨스’라는 형식을 띤다. “문재인-김정은, 오늘부터 1일”이라든가 “첫눈 오면 놓아주겠다” 같은 로맨스의 수사가 정치적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을 정치적 주체에서는 배제하되, 그 이야기의 소비자로 소환해내는 묘기를 선보인다. 남성 원팀 정치가 여성을 ‘표밭’으로만 여긴다는 의미다. 로맨스가 된 정치는 달달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여성 배제는 씁쓸하다.

우리는 아직 ‘가부장제 이후’를 만나지 못했다. 새로운 여가부의 성패는 이 ‘남성 원팀 정치’와 어떻게 잘 갈등하고 잘 교섭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 같다. 응원한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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