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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도로 기무사

opinionX 2018. 9. 4. 10:37

방산업체에서 일하는 한 예비역 장성은 지난해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회사 대표가 불러서 갔더니 그의 책상 위에 바로 며칠 전 열린 방위산업 관련 군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서류가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국군기무사령부 출신 직원이 현직 기무사 요원으로부터 이 정보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산업체에 취직한 예비역 대령도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다. 첫 출근을 했는데 회사 관계자가 자신의 군 인사 기록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군내 평가가 포함돼 있어 민망했지만 회사가 군의 허술한 보안실태를 비웃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인사혁신처 취업심사를 받은 대령급 이상 기무요원 24명 가운데 8명이 방산업체·단체에 취업했다(국회 국방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 자료). 기무사 고위 간부 3명 중 1명꼴로 전역과 함께 방산업체에 재취업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역할이다. 안 위원장은 “현직 기무사 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방산업체에 재취업한 전직 기무사 요원들에게 제공하고, 자신들도 퇴직 시 방산업체에 재취업해왔다는 사실을 관련자 진술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했다. 방산업체에서 보안을 지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방산 정보를 군으로부터 빼내오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 퇴직자들의 대기업 재취업보다 더 심각한 일탈이다. 그동안 숱한 현역들이 보안 누설 혐의로 처벌받았는데, 엉뚱한 곳에서 비밀이 새고 있었던 셈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안을 지키라고 하면서 정작 기무사 요원들이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니 황당하다.

기무사를 해편한 국군안보지원사령부가 첫발을 떼자마자 ‘도기사(도로 기무사)’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정도의 개혁이라면 과거 기무사와 다를 게 무어냐는 것이다. 방산업체를 둘러싼 기무사와 예비역의 커넥션에서 보듯 기무사 적폐는 사람과 규정을 바꾸는 것만으로 청산할 수 없다. 김영삼 정부가 하나회를 척결한 것처럼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군 정책은 기무사 개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무사 개혁은 지금부터다. ‘도로 기무사’는 촛불정신에 대한 치명적 배신이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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