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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서 내가 앞치마를 입고 잠들었다는 걸 알았다. 앞치마는 축축했다. 잠든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앞치마를 입고 주방 안에 있었다. 시간 내에 메뉴를 내놓기 위해, 무언가를 태워먹지 않기 위해, 손을 베이거나 데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어찌하면 기름 범벅인 불판을 말끔하게 되돌려놓을지, 어찌하면 행주를 하얗게 만들지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입고 잔 앞치마는 어떤 복장이 아니라, 긴장한 내 몸의 일부였다.
그 앞치마는 식당 오픈하는 날 박찬일 셰프가 주방 일을 지휘한 후 벗어주고 간 것이다. 웬만하면 이 길에 들어서지 말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말리던 이다. 말려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있나, 온갖 조언과 도움을 줄 수밖에. 결국 오픈하는 날 앞치마를 입고 나타나 그 아수라장을 참을성 있게 봐주고, 필요한 물품들을 즉각 주문까지 넣어준 다음,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주고 주방을 떠났더랬다.
그날 그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기억한다. 불판 근처의 주방도구들은 함부로 덥석 잡아서는 안된다고, 무조건 행주를 먼저 쥐고 잡으라고, 강조 또 강조했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화상을 입은 후에야 겨우, 일단 행주부터 손에 쥐는 습관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주방 곳곳에는 크고 작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나는 그걸 몸에 각인시키기 위해 앞치마 끈을 꽉 동여맨다.
근처에서 작은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준우씨는 연분홍 프릴 앞치마를 입고 일한다. 1990년대식 드라마에 집들이하는 새색시가 입고 나올 법한 모양새다. 그걸 입고 다찌에 앉은 손님들의 온갖 얘기를 들어주며 새벽 세시까지 영업을 한다. 나도 가끔 그 다찌에 앉는다. 앞치마를 벗고 앞치마 입은 사람이 내주는 안주에 하이볼을 마시면 잠깐이라도 긴장이 풀리고 느슨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앞치마를 벗었는데도 대화는 여전히 앞치마를 손에 쥐고 있는 형국이다. 도마를 어떻게 소독하고 행주는 어떻게 삶는지부터, 연어를 맛있게 숙성시키는 법이나 농어의 시세 같은 것까지. 나는 묻고 그는 설명해준다. 내가 힘들어하면 그는 연분홍 앞치마 치맛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춤을 춰준다. 천성이 유쾌한 주방장의 앞치마다.
영업이 끝나면 그는 그대로 노량진시장으로 간다. 다음날 쓸 재료들을 사서 가게에 놓고 나면 그제야 일과가 끝난다. 그렇게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도 운동만은 빼놓지 않는다. 근육을 단련시켜놓지 않으면 몸이 그 일과를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유쾌한 앞치마 속에는 그렇게 단련된 근육이 숨겨져 있다. 나는 그가 힘든 기색을 내비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그게 다 분홍 프릴 앞치마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의 슈트처럼 강력한 보호 장비는 아니어도, 힘들고 지친 몸을 보드랍게 감싸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망토 같은 것. 그래서 또 하루 흥겹게 시시덕거리고 장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가면 같은 것.
연남동에서 꽤 성공한 파스타집을 운영하는 진우씨는 테이프를 앞치마처럼 온몸에 두르고 일을 한다. 그가 만든 파스타를 먹어보기는 했지만, 주방에서 어떤 앞치마를 입고 음식을 만드는지는 보지 못했다. 다만 그가 셔츠를 들어올려 보여준 등짝의 푸른색 테이프가 내가 동여맨 앞치마 끈처럼 보였다는 것뿐. 그는 주방에서 일을 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치료를 위해 쓰는 것 같다. 병원과 한의원 등등에서 침을 맞거나 도수치료를 받거나 물리치료와 주사치료를 받는다. 오늘은 테이핑을 했고 내일은 척추교정용 장비가 배달되고, 통증을 물리치기 위한 필사의 노력들.
그의 팔뚝을 보고서 약쟁이 같다고 농담을 했었다. 온갖 화상과 베인 자국들과 멍들이 아주 과한 약쟁이 분장 같았다. 자신이 조심스럽지 못해서, 성질이 너무 급해서 이 모양이라고 스윽 팔을 쓸어내리는 폼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다. 그는 실제로 약쟁이다. 온갖 약을 달고 산다. 온갖 통증과 온갖 염증과 온갖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들. 영업이 끝난 후 더 늦게까지 여는 집을 찾아가 술을 먹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다.
그는 주로 내게 원가관리에 대한 충고를 해준다. 십 원 단위로, 양파 하나 가지 하나 오일 1그램, 하나하나 다 적어서 계산을 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하게 될 거라고.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그의 충고를 따라 한번 적어봤다. 아주 세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흉내 정도는 내봤다. 우리는 그걸 함께 들여다보며 한숨만 서로 푹푹 내쉬었다. 나보다 그의 한숨이 더 깊었다. 이 사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뭐 그런 호흡.
아메리칸 비스트로를 운영하는 오스틴의 앞치마는 검은색 면 앞치마다. 그가 모델 출신이라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흰색 셔츠와 어우러져 꽤 근사하고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매출로 치자면 가장 근심이 많은 집이지만, 그래서 속이 타들어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흰 셔츠와 검은 앞치마의 단정한 모습은 잃지 않는다. 나는 가끔 그 깔끔한 앞치마의 비결이 궁금해진다. 왜 내 앞치마는 하루만 지나도 온통 밀가루에 토마토에 기름 범벅이 되는지. 빵을 굽고 치킨을 튀기는 것도 아닌데.
지난 일요일 그 집에 모여 앞치마들의 회식을 했다. 각자의 식당에서 가져온 술과 안줏거리들을 모아놓고 주인처럼 손님처럼 밤 시간을 보냈다. 그날의 대화는 온갖 진상손님들의 콘테스트였고, 통증과 치료와 약에 관한 토로와 정보교환의 장이었고, 그동안 있어온 주방들의 역사서였다. 나는 그날 6개월 만에 얻은 디스크와 손목터널증후군 같은 병명들과 함께, 우왕좌왕 좌충우돌 선무당의 식당운영 분투기를 들려주었다.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아들었고, 너무나 어이없어 폭소를 터뜨렸다. 월요일은 쉬는 날이었으므로, 모두 느슨하게 편안했다. 거의 아침이 되어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앞치마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월요일은 앞치마와 행주를 삶아 너는 날인데, 하다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내일은 그냥 세비야 관광지에서 사온 빨간 땡땡이 앞치마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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