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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기로 마음 정하기까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국내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미 편지를 쓴 것이 그 자체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최근 읽은 <아주 낯선 상식>(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라는 책이 인상 깊어서 당신을 수신자로 불러냈습니다. <아주 낯선 상식>은,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영남패권주의를 정교하게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 챕터를 지난해 광주 보선 때 당신이 치켜든 ‘호남정치’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시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나 우호적이라는 것이 절대적 지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당신의 발언들에 기대어 ‘호남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본 뒤 다소 유보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호남정치’라는 것에 ‘반영남패권주의’라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첫걸음임을 인정합니다. 저는 당신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랍니다. 한 챕터가 당신에게 할애돼 있어서가 아니라, 이 책은 대한민국의 지역모순을 가장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록 가망이 크지 않지만 그 해소 방식까지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당신이 공부 천재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공부 천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편지에서 <아주 낯선 상식>이라는 책의 주장을 요약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에게 동의하며, 당신이 내세운 ‘호남정치’라는 프레임이 전략적으로 그다지 현명하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친노패권’ 프레임을 내걸고 ‘개혁 세력’ 내부의 영남패권주의자들과 싸우기로 했다면 그 효과가 더 컸을 것입니다.

당신은 옛 민주당에서 노무현 옹립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노무현 상임고문 주변에 원내 우군이 거의 없던 시절에, 당신은 ‘노무현 대통령’의 깃발을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결집해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선거일 저녁 출구조사에서 이미 ‘노무현 대통령’이 예견되기는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확정되기까지 저는 계속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확정됐을 때 무교동의 낙지집으로 달려가 행복한 소주를 마셨습니다.

2003년 민주당의 소위 개혁파 의원들이 분당을 추진했을 때, 저는 한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때 제가 민주당 분당을 격렬히 반대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와 전북대 강준만 교수도 저처럼, 아니 저 이상으로 민주당 분당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분당이 이뤄졌을 때, 저는 ‘우리가 만든 노무현 정부’라는 프레임을 내걸며 호남 유권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분당 뒤 민주당이 한나라당을 이용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했다는 사실이 제게 영향을 끼쳐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탄핵소추 이전에도 저는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와 강준만 교수는 저와 달리 여전히 옛 민주당의 지지자로 남았고, 강준만 교수는 그 분당의 충격으로 한동안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분당을 주도한 이들은 흔히 ‘천신정’이라 불립니다. 당신과 신기남, 정동영 세 사람의 성을 따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 분당 앞뒤로 신기남 의원이 “호남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나야 영남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며 제 고향 사람들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당시 한나라당의 비열한 선거전략을 고스란히 베낀 것입니다. 분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론의 핵심 아이디어가 힘센 새 친구를 얻기 위해 그 자가 싫어하는 옛 친구를 버리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비롯한 신당 추진파는 ‘망국적 지역주의’의 해소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신들이 그 거룩한 명분의 실현을 위해 고른 길은, 얄궂게도, 영남패권주의에 사실상 굴복하고 영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노무현 대통령은 방조하거나 북돋우거나 지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제1야당의 지지부진함과 내분의 뿌리가 바로 2003년의 민주당 분당이라는 것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분당 뒤에 뭘 크게 잘못했다기보다 분당 자체가 문제였던 겁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호남과 노무현 대통령 사이가 지금처럼 데면데면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분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여당과 제1야당의 주류가 모두 영남패권주의 세력으로 채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광주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와 대결하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소추의 반동으로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얻었지만, 그 과반의석으로 노무현 정권이 무슨 업적을 이뤘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소위 4대 악법의 개폐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몽니에 휘둘려 흐지부지돼 버렸고, 노무현 대통령은 마침내 선거법 개정을 매개로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시도하다 박근혜 대표에게 거절당하는 망신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당의 원내대표를 지냈던 당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장악한 친노세력에게 떠밀려나 당신이 광주에서 호남정치를 내세웠을 때, 나는 당신이 2003년 분당에 대해 사과할 줄 알았습니다. 호남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서였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의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도 호남 유권자들에게 분당을 사과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호남정치의 복원을 내세우는 당신이 그 분당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게 저는 의아합니다.

당신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노무현 정권에서 여당 원내대표와 법무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분당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부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2003년 민주당 분당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의 ‘호남정치’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분당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호남 유권자들을 친노 영남패권주의 세력의 인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남 유권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 세력에게 깊이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이 주도한 그 분당 때문에, 호남 유권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해야 했습니다. 선거 때마다 친노가 주류인 새정치연합에 몰표를 주지만, 새정치연합 주류는 영남패권주의를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호남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입니다. <아주 낯선 상식>은 당신이 지난해 보선에서 당선한 직후 서울대 조국 교수가 했다는 이런 발언을 소개합니다. “내가 호남사람이라도 새정치연합을 안 찍는다. 돈 대주고, 힘 대주는데 의사결정에선 소외된다고 여긴다면 찍을 이유가 없다.”

조국 교수의 이 발언이야말로 독립적 주체의 냉철한 합리주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호남 유권자들은 이런 냉철한 합리주의를 실천하지 못해왔습니다. 이제 이 희비극적인 인질극을 끝내야 합니다. 이 인질극을 끝내는 데 당신이 이바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낯선 상식>의 저자는 ‘신성광주’가 ‘세속광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광주가 세속의 욕망을 발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주장에 아무런 이의 없이 공감합니다. 호남 유권자들이 다른 지역 유권자들에 견줘 더 민주주의적이고 더 윤리적이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굴레에서 호남은 벗어나야 합니다.

호남의 일당지배를 이제는 끝장내야 합니다. 호남은 모든 정당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정당들과 거래해야 합니다.

호남에 정당한 이익을 주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정당이라면, 그것이 새정치연합이든 진보정당이든 심지어 새누리당이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새누리당이 80년 광주학살의 주체인 전두환 민정당의 후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노태우 기소를 통해서,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나마 5공과의 관련을 끊어냈기 때문입니다. 지역모순은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입니다. 지역모순을 모른 체하는 진보는 가짜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누리당을 지지할 일이 결코 없겠지만,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제 동향인들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당신의 ‘호남정치’가 닫힌 정치가 아니라 열린 정치가 되기 바랍니다. 한국 정치의 정상화에 기여하기를 빕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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