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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패다. 급하게 단추를 채우다 보니, 단추를 잘못 채운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누구나 단추를 잘 채운 옷을 입고 싶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 내게는 단지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겨진다. 첫 번째 선택지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단추를 차근차근 풀어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인내를 가지고 단추를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 단추를 잘못 채운 결정적인 부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부분, 잘못 채워진 부분을 제대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나 성가신 일 아닌가. 혹시 단추를 잘못 채웠다는 나의 느낌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단추를 잘못 채운 것 같다는 느낌을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고 계속 단추를 채워가는 것이다. 언젠가 단추 채우기가 무사히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단추를 다시 풀면서 뒤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 맞겠지 하고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인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추를 다시 풀어 잘못 채운 부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결국 과거에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 과거나 현재를 간단히 부정하고 미래만을 보고 간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첫 번째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심각하게 어느 지점에서 사랑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지 처절하게 복기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실패한 사랑을 응시하는 것은 가슴 아린 일이니까. 방금 딱지가 앉은 상처를 다시 후비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상처를 후비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첫 번째 사랑의 비극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두 번째 사랑에서 사랑의 결실을 바랄 수 있겠는가.


과거에서 구원의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인문학이 얻은 핵심적인 통찰이 아닌가. 프로이트가 환자의 내면을 뒤지며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찾아들어간 것도, 그리고 베냐민이 자본주의가 안겨준 불행을 해소하기 위해 19세기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이 잡듯이 뒤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에 생긴 트라우마는 환자의 현재를 지배하고, 나아가 미래도 결정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19세기에 그 틀을 갖춘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 시대를 거쳐서 미래 세대의 삶도 지배할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바꾸고 싶은가? 그것은 개인의 경우든 사회의 경우든 모두 잘못 채워진 단추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지금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정신이 언제 틀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거의 시점으로 육박해가야만 한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처럼 뒤틀리게 되었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유신·인혁당 등 과거 놔두고 미래만 보자는 ‘책략’이 있다

과거가 잿빛이면 미래도 잿빛…‘과거 투쟁’서 물러서선 안돼”


생각해보라. 일본의 사학자들이 집요하게 과거사를 왜곡하는 이유를. 일본 제국주의가 결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에 우리는 쉽게 콧방귀를 뀐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아직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본의 주장이 먹힐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우리마저도 이 세상을 떠난 뒤 100여년 후에는 그럴 수 있을까? 분명 과거 왜곡을 방치한 대가는 전적으로 우리 후손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지금 우리를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미리 장악하고자 하는 무서운 시도다. 결국 일본의 미래 세대들과 우리의 미래 세대들 사이에 갈등과 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거를 둘러싼 투쟁이 현재에 이루어진 투쟁보다 더 파급력이 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야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을 망령처럼 떠도는 이상한 이야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일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유신독재도 그리고 유신독재가 남긴 상처도 ‘퉁치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유신독재라는 그 치욕스러운 과거를 현재 살고 있는 그 누구도 문제 삼지 말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신독재는 ‘박정희’라는 형식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장준하’라는 형식과 ‘전태일’이라는 형식도 만들어냈다. 지금 나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자리에 구체적인 인물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이 있었기에 ‘전두환’이 가능했고, ‘장준하’라는 형식이 있었기에 지성인에 대한 탄압이 가능했고, ‘전태일’이란 형식이 있었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반드시 유신독재라는 잘못 채워진 단추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독재자라는 형식, 그로부터 파생되는 지식인 탄압과 노동자 억압이라는 형식을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U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 등장하는 말이다. 베냐민의 서늘한 역사 감각에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우리 탓이다. 그들을 다시 눈물 흘리게 한 것은 바로 우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과거를 둘러싼 투쟁에서 물러서서는 안된다. 잘못 채워진 단추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계속 피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 피눈물은 먼 미래를 절망으로 물들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의 슬로건이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여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역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저 멀리 지나가버린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는 집요하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과거가 잿빛이면 현재나 미래도 잿빛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 그 잿빛을 제거해야만 한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그 잿빛을 ‘퉁치자’는 움직임, 다시 말해 과거 잘못 채워진 단추를 그냥 내버려두고 미래만을 보자고 유혹하는 암울한 책략에 직면해 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망스러운 미래를 되찾는 결정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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