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신주 | 철학자
모순도 오래되면 느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산다는 것.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둘 사이의 간극에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다. 그렇지만 무감각해졌다고 해도 모순은 모순일 뿐이다. 세입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용산참사나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쌍용자동차 사태, 어느 여성을 크레인 꼭대기까지 내몰았던 한진 사태, 그리고 서울역 후미진 곳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의 풍경 등등. 우리 삶을 지배하는 모순은 언제든지 핏빛 얼굴로 나타나 우리의 삶을 동요시키며 결단을 요구할 수 있다. “당신은 자본주의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살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양자택일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자본주의적 삶과 민주주의적 삶 사이의 모순을 다시 느끼려면 주주총회와 선거의 차이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주주총회를 보자. 10명의 주주가 총회를 갖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전체 주식의 90%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9명은 각각 1%의 주식만을 가지고 있다. 회사의 이익을 배당받을 때나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때도 대주주 한 사람이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나머지 9명으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주총회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각자가 소유한 자본의 양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든 대통령을 뽑는 선거든, 미래 공동체의 삶을 결정하는 선거에서 이들 10명은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표자를 선출할 때 재산이나 교육의 정도 혹은 신앙 등에 의해 선거권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보통선거’의 이념이다.
주주총회가 인간의 수가 아니라 자본의 양으로 결정된다면, 선거는 자본의 양이 아니라 인간의 수로 결정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모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과 인간 사이의 모순이라고 불러도 좋고, 재산권과 인권 사이의 갈등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니면 경제와 정치 사이의 모순이라고 이야기해도 된다.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비극은 항상 자본이 인간을 압도하려 할 때 벌어진다. 삶의 수단이 우리 삶을 옥죄는 핏빛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어떻게 하면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려는 역설, 혹은 자본이 인간의 숨통을 조이는 역설을 해소할 수 있을까. 이것은 자본주의가 경제체제로 정착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문정신들이 해결하려 했던 문제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는 항상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자본 앞에 구겨진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다름 아니다.
선거에서는 재벌총수 한 명과 노동자 한 명이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지금 대선 후보들은 앞을 다투어 ‘경제민주화’라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어쨌든 재벌총수 한 명의 지지를 받는 사람보다 노동자 두 명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권력을 잡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여당 후보든 야당 후보든 아니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소속 후보든 모두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역설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보통선거 이념에 따라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로서는 불가피한 전략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자식이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자식이니까. 그렇지만 아는가? 민주주의의 자식이긴 한데, 대선 후보들은 모두 사생아라는 사실을.
일러스트 _ 김상민(출처: 경향DB)
▲ “지금 대선 후보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사생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주장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장밋빛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면 대선 후보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본의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이 성장해야 그렇게 성장한 것을 다시 노동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빵이 커지면 빵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해묵은 논리다. 이제야 대선 후보들이 모두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정의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가가 얻은 이익을 환수해 노동자들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이념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공정하고 윤리적인 통치자가 불가피한 법이다. 그러니 지금 역사관이나 윤리성이 대선의 첨예한 쟁점이 된 것이다. 혹시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대선 후보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사생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문제의 핵심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자본이 그들의 생각처럼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도대체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바로 이 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표방하는 공정한 분배라는 이념은 분배할 것이 충분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거나 불행히도 불황이나 공황이 엄습할 때, 사회민주주의는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분배할 것이 없다면, 그들의 권력 기반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불황의 순간에는 항상 자본 편을 들 수밖에 없다. 호황일 때는 민주주의자의 가면을 쓰지만, 불황일 때 사회민주주의자는 가차없이 자본주의자로서의 맨얼굴로 드러내는 형국인 셈이다.
이미 우리는 겪지 않았는가.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권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시도했던 사실을 말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FTA를 도입한 것은 스스로 공정한 분배자라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본이란 빵을 키워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명확하지 않는가. 빵이 커야 나누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노무현 정권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몰랐던 것이다. 빵이 작든 크든 항상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과거 조선시대를 떠올려보자. 민중이 보릿고개를 겪고 있을 때, 지주나 관청의 곳간에는 쌀이 썩어가고 있었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인간애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결과물은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이 불황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불황에 이르러 자본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리해고든 뭐든 인간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깊이 생각할 때 아닌가. 위기의 순간에 더 절실한 것은 자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을 긍정하는 자세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대선 후보에게 물어볼 것은 경제민주화나 복지, 혹은 그들의 공정성이 아니다. “빵이 커지지도 않고 오히려 작아질 때, 당신은 자본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인간 편에 설 것인가?” “혹시 당신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난 칼럼===== > 강신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대선 후보들, 고통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은 있나요? (0) | 2012.11.18 |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노동의 가치 (0) | 2012.11.04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누가 ‘과거를 퉁치자’고 하는가 (0) | 2012.09.16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빚 권하는 사회 (0) | 2012.09.02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지금 누가 파시즘적 유령을 불러내는가 (0) | 2012.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