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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마치 콩가루처럼 서로 반목하는 가족이 있었다. 어느 새 성장한 자식들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권위적인 부모 사이에 있을 법한 갈등이다. 성장한 자식들은 어머니가 가진 억척스러운 이기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자식들의 불만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고조시켰다. 어머니가 쓰레기를 이웃집 근처에 투기하다가 이웃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웃집의 정당한 문책에 어머니는 증거가 있느냐며 뻔뻔스럽게 맞서기까지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해묵은 이기주의를 버리라고 질책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이기주의가 아니었으면 이만큼 살 수도 없었다고 항변한다. 자신의 억척스러움으로 자식들이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어머니로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당연히 어머니와 자식들 사이의 관계는 서먹하고 불편해져만 갔다. 가족 이기주의를 버리기보다 어머니는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고뇌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에 특단의 조치가 떠올랐다. 자식들이 들어올 때 쯤, 그녀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평소 소원한 관계였으니, 그녀의 정치적 책략을 관철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상대였다. 고성이 오가는 다툼 끝에 머리채를 부여잡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상대방 가족들까지 총출동해서 그녀를 핍박하려는 위기의 순간에, 마침 귀가하던 그녀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궁지에 빠진 것을 목격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아무리 어머니와 갈등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웃 아주머니인가,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인가? 어머니와의 반목도 잊고 그들은 어머니 편을 들고 상대방 가족들과 맞섰다. 


한밤중의 전쟁 아닌 전쟁이 끝난 뒤, 어머니와 자식들은 개선 부대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순간적이나마 가족 내부의 갈등은 미봉되며,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동지 의식이 복원된 셈이다. 싸움의 와중에 생긴 자신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면서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던질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억척스러운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은 채 어머니로서의 권위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놀랍지 않은가? 어머니는 20세기의 가장 문제적인 정치철학자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의 통찰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작은 책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에서 슈미트는 우리에게 섬뜩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정치적인 것, 다시 말해 정치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는 항상 적과 동지라는 범주가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 출처 :경향DB)


그렇다. 어떤 공동체를 적과 싸우도록 한다면, 그 공동체 성원들은 동지라는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아니 공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내부에 발생할 때마다, 국가권력은 외부의 적을 설정하면서 내부의 갈등을 미봉하는 정치적 기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쟁 중에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결국 이적행위를 하는 꼴이 된다. 바로 이것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도 국가권력은 전쟁과 갈등과 같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언제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 슈미트가 국가기구란 본질적으로 갈등과 반목에 의지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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