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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성을 보장하는 체제다. 돈이 상품과는 달리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10만원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10만원에 상당하는 상품 중 어떤 것이든지 구매할 수 있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면 자장면을, 아름다운 장미를 애인에게 주고 싶다면 장미를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상품을 가진 사람은 이런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질 수가 없다. 자장면을 만든 사람이 아무리 애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려고 해도 돈이 없다면 불가능한 법이다. 반드시 자장면을 팔아 장미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어야만 한다. 급하다고 해서 자장면을 들고 꽃가게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자장면이 있으니, 장미 한 송이만 주세요.”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취업하려고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몸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신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려고 지금도 애를 쓰고 있다. 상품 상세 설명서, 그러니까 스펙이란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 스마트폰은 인터넷 속도가 빨라요, 그리고 앱도 다른 기종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활용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시중에 좋다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화소를 가진 카메라도 장착되어 있구요.” “저는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니컬한 지적처럼 정말 지금 우리는 보편적 매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이 없다면, 우리는 옷과 집과 같은 생필품조차도 구할 수 없는 사회에 살 수 있으니까.
자본가의 파괴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팔아서라도 얻으려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회사 CEO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그가 존경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든지 나를 해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내게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는 속담이 맞긴 맞나보다. 월급날 우리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니까 말이다. 우리는 작은 자본가가 된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탈바꿈한다. 이제 상품은 자본가가 가지고 있고,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냉혹한 원리, 그러니까 돈을 가진 사람이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원리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자본가의 잉여가치 보호하는
신용카드 남발과 대출제도
노동자에게 봉급 이상 지출 조장
자본의 탐욕 통제 장치는 없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출처: 경향DB)
평상시 자본가들은 소비자로 변신한 노동자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자본이 만든 상품을 사느라 자신이 가진 돈을 다 소비할 테니 말이다. 바로 여기에 자본의 신비가 숨어 있다. 노동자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는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볼까. 사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이유는 그것으로 상품을 구매하라는 암묵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비자가 된 노동자들이 상품을 사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봉급으로 주었던 돈이 상품 대금으로 회수되지 않을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괴물이 가진 유일한 약점, 즉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광고를 통해 소비를 유혹하는 전략, 마케팅이 중요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자에게 봉급으로 주었던 돈은 반드시 회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로서의 위엄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마케팅이고 뭐고 더 이상 노동자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허영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광고도 더 이상 노동자의 지갑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고 말고는 돈을 가진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로서는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침내 묘수 한 가지가 자본가의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바로 신용카드와 대출로 상징되는 신용경제 시스템이다.
신용경제는 노동자가 아무도 모르게 미래에 쓸 수 있는 돈을 미리 댕겨서 쓰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결국 신용경제는 빚경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용경제는 또한 얼마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신용카드나 대출을 통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든 우리는 가볍게 명품가방도 구입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과시하는 허영인 셈이다. 또한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신용카드는 치명적인 마력을 발휘한다. 친구나 동료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은행의 단말기는 어떤 꾸지람도 없이 버튼만 누르면 가볍게 300만원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신용경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상거래는 주로 신용카드로 이루어지고 있고, 웬만한 결제는 이제 스마트폰으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어디서나 신용경제는 우리의 허영과 자존심을 음흉한 미소로 어루만져주고 있는 셈이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나 혹은 남에게 돈 이야기를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 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일수록 신용경제는 견디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사악한가? 마치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신용경제는 우리가 돈이 궁해질 때를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빚을 지게 될 때 자본은 빚을 진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우리 탓으로 돌릴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 부주의한 당신 탓이라고 말하는 기만적인 거미처럼 말이다. 부동산이든 명품가방을 사고 싶을 때, 혹은 갑자기 급전이 필요할 때, 우리는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순간적인 단맛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항구적인 채무자의 길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신용경제가 발달할수록 신용은커녕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지만 자본은 그런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국민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지금 자본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부동산을 통해 경제 불황을 타개하겠다고 정부가 내놓은 정책, 그러니까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하겠다는 정책을 보라. 다시 우리들에게 빚을 내 부동산을 구매하라는 요구가 아니면 무엇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나 우리는 빚을 권하는 나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날 수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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