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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옛 한국 영화를 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모으고 복원해 온라인에 공개해놨다. 1960~1980년대 시대상을 타임머신 탄 듯 관찰하면 현재를 낯설게 바라보게 되는데, 동시대의 ‘날줄’만으로는 잡을 수 없던 생각의 ‘씨줄’이 손끝에 닿는다.

여성상은 그 씨줄의 한 가닥이다. <오발탄>(1961)에서 해방촌의 명숙은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양공주’가 된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에서 식모였던 주인공은 사고로 한 팔을 잃고는 종로 뒷골목으로 흘러든다. <뽕>(1986)은 가난하고 억척스러운 인협이 일제 치하 산골에서 몸 파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상류층 여성이 등장하는 <맨발의 청춘>(1964)같은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여성들은 가난의 최전선에서 힘겹게 버텨낸다.

이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는 온기가 어려 있다. 여성의 아름다운 몸을 욕망하고 손찌검하고 차별하다가도 끝내 기구한 삶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얼핏 모순적인 이 같은 태도는 여성 가족구성원의 희생에 대한 한국 남성들의 집단적 부채의식, 그러니까 미안함과 죄의식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희생했고, 딸은 고등교육의 기회를 오빠나 남동생에게 양보하고 공장 노동자와 식모같이 저임금의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가부장사회에서 한 가족이 성공을 꾀할 때, 집중된 자원의 수혜를 입는 쪽은 대개 남성이었다. 자동차 운전을 배워 성공하겠다던 영자가 학원비가 없어 포기했던 것처럼, 여성들에게 현실은 좀체 벗어날 수 없던 강력한 중력장이었다.

이들 영화와 비교하면 오늘날 여성에 대한 싸늘한 온도는 두드러진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된장녀’ ‘김치녀’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모 개그맨의 여성 비하 발언은 글로 옮기기 참담할 지경이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수준의 혐오는 이미 오프라인으로 울타리를 넘었다. 각종 TV쇼에서는 재능있는 여성 희극인들을 ‘오크녀’인 주제에 예쁜 척한다며 웃음거리로 만든다. 지상파의 막장드라마에는 욕심 많고 그악스러운 여성 캐릭터가 시청률 상승을 위한 ‘욕받이 무녀’처럼 등장한다. <무한도전> <1박2일>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은 남성천하다. 한국 영화산업은 2013년 매출 1조8839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지만 여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종교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워싱턴시의 포스터 (출처 : 경향DB)


여성혐오의 여러 사회적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괜찮은 일자리’ 부족이 아닐까. 남성에게 여성은 연민이 아닌 경쟁 상대이다. 1990년 33.2%였던 대학진학률은 2008년 83.8%로 정점을 찍었다. 2009년에는 남학생보다 더 많은 여학생이 고등교육에 진입했다. 여성고용률은 지난해 54.9%로 30여년 만에 13%포인트 넘게 늘었다. 하지만 일자리는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비정규직화됐고 청년실업률은 올 3월 10.7%로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양성평등은 그렇잖아도 작아진 ‘밥그릇’을 나누자는 고까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노동시장 변화 여파로 달라진 결혼과 연애의 룰도 남성들에게는 불편하다. 일부일처제가 대부분의 남성에게 허용됐던 시기는 인류사상 2차 세계대전 이후 폭발적 경제성장기에 불과했다.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안정적 파트너를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구조는 멀고 개인은 가깝다보니, ‘거절’에 좌절한 남자들은 여자를 미워한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한 랍비는 카인이 아벨을 죽도록 미워한 이유가 ‘여자’(성), ‘땅’(경제), ‘정체성’(인정욕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그 중 ‘성’과 ‘경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문화시민이라면 아무 데서나 배설하지 않듯이 대중을 상대로 혐오같은 부정적 감정을 투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같은 룰은 점점 희미해지는 듯해 걱정이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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