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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때 제주공항에서였다. 청사 이륙장 휴게실에서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무엇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대합실 의자에 앉아 절반쯤은 졸면서, 마치 환영을 보는 것 같았다.

줄지어 서 있는 하얀 기둥에 한 명씩 줄줄이 기대 서 있는 이들은 스마트폰 충전을 위해 기둥에 붙은 콘센트에 충전기를 꼽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플러그인하고 있는 영화 속 사이보그의 모습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죽이기 위해 목 뒤에 꽂힌 플러그를 뽑으려고 하는 장면이나 동료들의 몸에 꽂힌 플러그를 뽑기 시작하는 배신자 사이퍼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동시에 사이버세계와 사이보그를 예측한 윌리엄 깁슨의 소설이 떠올랐고, 그것이 현실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베개맡의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집을 나온 후에도 스마트폰은 늘 손안에 있다. 손안의 스마트폰은 더 이상 디지털 도구가 아닌 신체의 일부다. 검색을 하고. 쇼핑을 하고, 버스나 지하철 티켓을 대용하고, TV 시청을 하고. 게임을 하고, 대화를 하고, 때로는 지갑이되기도 하는, 아주 신체에 유용한, 그래서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이보그가 됐다.

얼마 뒤 손을 대신하던 스마트폰은 홀로그램으로 대체돼 스크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눈동자의 초점은 키보드를 대신할 것이고 더 이상 스마트폰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피부에 이식된 칩이 스마트폰을 대신해 전자신용카드가 되고, 전자지갑이 되고 여권, 열쇠 역할까지 동시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2'_경향DB


지난해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한 연구팀이 무선 충전이 가능한 쌀알 크기의 인공 심장박동기 삽입기술을 개발했다. 그 이전부터 인간의 몸에 의료장치가 이식되는, 사이버보그 시대가 시작된 지는 오래다. 하지만 무선 충전이 가능하다는 데서 본격 사이보그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언론은 흥분했다. 윌리엄 깁슨이 보고 있었다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을지 모르겠다.

<매트릭스> <공각기동대> <아바타> <인터스텔라> <블레이드 런너> 같은 영화의 모태가 된 것만 보아도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는 세대를 뛰어넘는 경이로운 소설이다. 그의 뛰어난 예지력과 천재적인 상상력은 향후 테크놀로지로 실현된 바 있다.

게다가 원격지에서 타인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심스팀(simstim)이라는 장비는 최근 거액에 페이스북에 인수된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의 가상현실 헤드셋이 비슷하게 상용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유전자 재배치, 인공장기 교환, 복제인간 등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연구들을 이미 완성시켰다.

아무튼 소설 속 해커는 자유자재로 정보 네트워크에 침투해 중요한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훔치면서 살아간다. 정보의 가치와 혁명, 그리고 해커의 동향에 대한 묘사에 이르게 되면 잠시 최근 탈고를 마친 소설이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다, 또한 사이버 스페이스와 정보화 사회, 인공지능,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거대 기업의 이야기는 거의 현실을 판에 박아놓는 듯한 느낌이다. 모든 기계와 가상현실은 인간의 통제 안에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시스템의 통제를 받는 것처럼, 인간이 인공지능의 매개체로 전락하는 미래 사회. 그것이 윌리엄 깁슨이 바라본 세계이다.

인공지능 침투용, 즉 인공지능 해킹용 프로그램까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뉴로맨서>에서 치밀하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모종의 암시, 즉 위대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테크놀로지 세계가 결국은 그 테크놀로지에 의해 지배당하게 될지 모를 ‘치바시의 빗방울 떨어지는 음울한 회색 하늘’ 같은 미래 말이다.

머지않아 인간의 감각기관과 신경망을 연결해 타인의 눈과 귀를 자신의 것처럼 활용하는 해킹 공격기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핵시설 원심분리기를 무력화시킨 스턱스넷 악성코드 같은 사이버 무기까지 만드는 세상에 다양한 해킹방식과 사이버 무기가 선보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해커들은 취약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의 취약점을 사냥꾼처럼 찾아나서고 있고, 네트워크 사회는 여기저기 보수 공사 중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가 던진 음울한 문제제기에 어떤 답을 할 것인지, 우리가 대답할 차례이다.


최희원 | ‘해커묵시록’ 작가·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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