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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보다 더 편하고 익숙합니다. 다행히 실재 세계를 선택하든 위조된 가상세계를 선택하든 제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준 가족들에게도 늘 감사하고 있죠. 저는 컴퓨터에서 신비감을 늘 맛보곤 합니다. 일상에서 넘기 힘든 한계들이 디지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국가기관이나 정보기관들의 네트워크도 저의 장난감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치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이때처럼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느껴본 적이 없죠. 물론 외줄을 타고 절벽을 건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겁이 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외롭고,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해킹을 배웠고, 보안을 뚫는 해킹기법을 연구했습니다. 손쉽게 목표물을 무력화시키고, 원하는 정보를 ‘술술’ 제 컴퓨터로 옮겨다주는 바이러스나 악성코드를 만들면서 피가 끓는 흥분을 만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악성코드나 바이러스 등 최첨단 사이버 무기, 해킹기법 등…. 오랜 기간 첨단 해킹기법을 연구하고, 코드에 몰두하던 저는 그것보다 더 공략이 쉽고 중요한 침입 시스템을 발견했습니다. 철통 같은 최첨단 보안 시스템도 100% 승률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기술적 시스템에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이라는 보안의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간이 개입된 모든 침입 시스템입니다. 이해가 쉽도록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제가 타깃으로 한 회사를 정했습니다.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더군요. 나는 물에 번진 이력서를 서류봉투에 넣고 회사를 찾아갑니다. 인사 담당자에게 어둡고 슬픈 표정으로 호소합니다. 암병동에 있는 어린 딸을 면회하고 나오다가 이력서에 물을 쏟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물에 젖어 망가진 이력서를 다시 출력할 수 있겠느냐고 도움을 청합니다. 인사팀 직원은 “암병동”이라는 말을 듣고, 제가 넘겨주는 USB를 자신의 컴퓨터에 꽂아줍니다. 그 직원이 컴퓨터에 USB를 꽂는 순간 회사의 컴퓨터망은 악성코드에 장악되고, 위태로워집니다.
아,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3년 전의 일입니다. 한 대기업 직원이 또 다른 타깃이었죠. 그는 보안 총책임자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성가대 활동도 합니다. 그는 4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솔로입니다. 저는 같은 성가대에 가입했고, 그의 고교 후배가 됐죠. 가짜 졸업증도 이미 발급해놓았고요. 그가 매일 피트니스클럽에 다닌다는 정보를 습득했죠. 우연을 가장해서 피트니스클럽에서 자주 만났고, 운동 후 커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죠. 그는 가정을 꾸리길 원했어요. 제 사비를 털어 결혼정보회사에 그를 가입시켰습니다. 매니저에게 비밀을 지켜줄 것을 약속하고, 그의 기본적인 정보와 사진, 좋아하는 여성상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몇 번의 만남 끝에 원하는 이상형의 여자를 만났고,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빼고 저를 가장 신뢰하고 있고, 저는 그 대기업의 기밀정보를 공유하게 되었고, 시스템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보안은 가공할 만한 악성코드나 바이러스, 첨단 시스템과의 싸움이지만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인 인간을 공략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보안을 다루는 것은 인간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자면 사회공학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사회공학은 인간 상호 작용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속여 정상적 보안절차를 깨트리기 위한 비(非)기술적 침입 방법입니다.
보안 시스템이나 백신 프로그램 같은 것은 지속적으로 패치나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지만 사회공학이 노리는 인간의 마음을 패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때로 돈만으로도 쉽게 공략이 가능합니다. 미국, 영국 등의 회사원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직원들의 4분의 1은 1000만원 정도만 손에 쥐여줘도 기업의 기밀을 넘겨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철통 같고 강력한 보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인간이 개입돼 있기에 구멍과 틈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유명한 해커 캐빈 미트닉은 첨단기술과 사회공학을 제대로 활용해 그것을 실증해 보인 그 분야의 대가였죠. 그는 사람들을 조작하고, 혼란에 빠뜨리고, 속임수를 사용했죠. 혹시 사회공학 따위는 자신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그 따위 것의 먹이 같은 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떠드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제게 연락 한번 주세요. 제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가을입니다. 시간 나면 다시 연락드리죠. 건강하세요.
최희원‘해커묵시록’ 작가, 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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