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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올 때에 경기도에 들어오니 길가에 나와 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사유를 물으니, 경기감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백성들이 나와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많아 어가(御駕)를 가로막고 하소연할까봐 금지한 것이라니, 용서할 수 없다.”(세종 26년 5월7일)

현대 한국인들이 ‘겨레의 성군’(서울 통인동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 표석에 새겨진 문구다)으로 추앙하는 세종은 어가를 가로막고 하소연하는 굶주린 백성들의 불경(不敬)이 아니라, 왕의 이목을 어지럽힐까 걱정하여 왕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은 고위 관리의 충성심에 격분했다. 그는 불쌍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왕정의 도리이며, 그 길을 막는 신하는 벌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글을 창제한 것도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의 소산이었다. 세종에게 ‘이르고자 할 바(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그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한글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는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측은지심), 더러운 것을 미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수오지심), 자신을 낮추고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을 인간의 본성으로 설정하고 이들을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知)에 배정했다. 나아가 정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측은지심을 근간으로 한 정치, 즉 인정(仁政)이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재난을 당한 사람,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정의 요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최고통치자에게 직접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는 길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다들 익히 아는 신문고가 있었고, 왕이 행차하는 길에 어가 주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직접 호소할 기회를 얻는 격쟁(擊錚)이 있었으며, 왕이 고충을 직접 들어주는 공시인순막(貢市人詢)이 있었다. 이런 정치 이념 때문에 조선왕조가 망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그보다는 이런 정치 이념 덕분에 500년 이상 존속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노론 일당 장기 집권 체제가 인정의 이념을 허구화하면서부터였다.

측은지심은 인정(仁政)의 요체일 뿐 아니라 인지상정(人之常情), 즉 인정(人情) 그 자체이기도 하다. 더럽고 부패한 걸 거리끼지 않는 사람, 거만해서 사양할 줄 모르는 사람, 무식해서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더러 ‘인정머리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인정머리 없다’는, 동정심이 없어 불쌍한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는 매몰찬 인간에게 쓰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이 단원고 2학년 3반 티셔츠를 입고 국회 본청 계단 앞에 노란 종이배를 놓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런데 작금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 민족이 세종을 ‘겨레의 성군’으로 숭앙하는 민족이라고도, 이 나라가 인정(仁政)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고도,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제 자식이 억울하게 죽은 이유나 속 시원히 알아야겠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경찰, 텅 빈 가슴 부여안고 단식하는 유족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퍼붓는 관변단체 회원들, 살았을 때 잘해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며 목숨 걸고 단식하는 아비 뒤를 캐어 세상에 몹쓸 사람인 양 매도하는 언론인들, 이 모든 일을 자기와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인 양 외면하고 뮤지컬이나 관람하며 활짝 웃는 최고통치자. 35년 전에 아비 잃은 딸 보고는 불쌍하다면서도 140일 전에 자식 잃은 부모더러는 그만 슬픈 척하라며 비난하는 사람들. 인정(仁政)은 둘째 치고 인정(人情)상으로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측은지심을 버린 정치는 폭정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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