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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을 다녀왔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난 다음 방콕의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태국 민중들은 쿠데타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방콕은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쿠데타가 일어나기 이전보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쿠데타 전만 하더라도 쇼핑몰이나 지하철역에 들어서면 ‘형식적’인 검문이 있었는데 아예 그 검문을 하지 않는 곳이 더 많았다. 쿠데타 이후 치안이 불안해지지 않고 더 안전해졌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역력했다.

지하철역에서는 군인이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이 모든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홍보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창밖 풍경을 스케치한다. 군인이 길을 건너는 할머니를 돕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선전을 해야 할 정도로 ‘평온함’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었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곳곳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군인들이나 시민들 모두,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면 그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그 선을 넘고 사라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학자와 방송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침묵 서약’을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고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독재자들의 요구사항이었다.

사라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진실을 보여준다. 방콕에서 당신이 누릴 수 있고, 당신이 보호받을 수 있는 자유는 ‘쇼핑할 자유’였다. 그러나 정치적 발언은 하지 마라. 그 선을 넘으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침묵을 지켜야만 사라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태국 방콕에서 열린 반군부 시위에 참여한 남성이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_ AFP연합


사라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그 사회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누가 사라졌는가, 왜 사라졌는가를 따지는 것은 결코 사라진 사람들을 그저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와 그 사회를 통치하고 있는 세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독재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하고 혹시라도 눈치를 채면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라진 사람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폭로하는 증인들이다. 그러므로 이 증인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들을 두 번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한 번은 권력에 의해서, 다른 한 번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은 태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국의 이야기다. 지난 몇 달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배를 타다 사고가 나서 사라졌고, 그 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다 사라졌다. 군대에서 맞아서 사라지고 공장에서 사고를 당해 사라졌다. 이 모든 ‘사라짐’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증언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라짐을 집요하게 기억하여 우리 사회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사회’를 ‘기억의 공동체’로서의 사회로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유가족들보고 사라지라고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사라짐을 성찰하기는커녕 사라짐을 기억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사라질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만하면 되었다며 지겹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라짐은 곧 희생자들의 영원한 죽음이며 나아가 기억의 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죽음이다. 그들과 함께 사라지라는 이 요구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지겨워해야 하는 것은 100일이 넘도록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추고 망각을 강요하며 한국 사회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저 권력이다.


엄기호 | 덕성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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