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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처서를 지나 이제는 가을 문턱에 걸터앉았다. 때아닌 가을장마가 열대야를 저만치 밀어내고 있다. 가을 바람 한 줄기가 끈적함을 빼앗더니 달아난 입맛까지 돌아온다. 벌초 행렬이 주말 고속도로를 꽉 채웠고 이제는 추석 차례상을 준비해야 할 때다. 가을이 시작됐다. 추석을 코앞에 두고 단식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었다. 2013년 9월의 얘기다. 쌍용차 국정조사 촉구를 요구하며 21명이 대한문 앞에서 단식을 했다. 그 전 2012년 10월엔 같은 장소에서 쌍용차 김정우 전 지부장이 쌍용차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42일간 단식을 했다. 단식은 의식적으로 굶는 행위다. 온몸을 바쳐 절박한 요구를 관철하려는 정치적 행위다. 이런 단식에 숱한 마타도어(흑색선전)만이 횡행했다. 굶어서 무엇이 해결되느냐를 물었고 조롱한다. 심지어 무엇을 먹고 하는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정치 공세만 높았다. 달래고 으르기만 할 뿐 쌍용차 문제 해결은 결국 없었다.

44일째.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가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단식이 길어지니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김영오씨 신상털기가 한창이다. 이혼 전력과 금속노조 조합원이란 이유를 교묘하게 짜깁기하고 있다. 인과관계 없는 항렬이 조합되고 상관관계 없는 근거들조차 하나로 뭉뚱그려져 공격의 수단이 되고 있다. 가족관계의 슬픔이 공격의 재료로 재등장한다. 44일 단식의 고통이 일반 시민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발악이며 몰염치다. 단 하루라도 굶어본 적이 있는 자들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짓이다. 오장육부가 말라비틀어지는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인간이라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소금뿌리기다. 이런 정치 공세는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의 주객을 바꿔 청와대와 집권여당으로 응집하는 화살 부러뜨리기다.

김영오 씨에 대한 악성루머 캡쳐본


하루 종일 틀어대는 종편에선 한국 사회에 단식 투쟁이 난무한다고 한다. 단식 투쟁이 무분별하다는 훈계와 조롱만이 커지고 있다. 단식의 절박한 현실은 뒤로한 채 의도와 꿍꿍이가 있지 않으냐는 혐의는 더욱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단식 투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 같은 한국 사회의 저열하고 졸렬한 정치 때문이다. 조정과 조율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채 피해자를 궁지로 몰아가는 정치 현실이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믿음이 한 자락도 있을 수 있겠는가. 단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가 잘못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박탈한 채 단식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발가벗은 정치가 문제의 원인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결은 결국 정치가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하지만 남 탓만 하고 있다.

단식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이다. 잇몸이 내려앉고 장기가 헛돌기 일쑤다. 시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기억력은 가뭇거린다. 일상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장기간의 단식은 생명의 불씨를 작게 만든다. 그럼에도 단식이란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 엄중한 현실이 있다.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하지 않는가. 어떤 이유로 수백의 목숨이 그렇게 무참히 한순간에 사라진 것인지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지 않는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기다. 세월호특별법이 정치 흥정거리로 추락하고 여야 거래의 산물로 전락하는 현실을 두고 어떻게 단식을 포기할 수 있는가. 길어지는 단식을 무작정 비난하고 중단할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단식을 끝낼 수 있는 여건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 사진에 찍힌 김영오씨의 마를 대로 마른 다리를 봤다. 앙상하게 말라 기력 없는 정치, 참혹한 정치가 부른 비참한 현실. 그 모습이 한국 정치다. 어디까지 밀어낼 것인가. 어디까지 죽음의 문턱으로 손짓할 텐가. 죽음을 부르는 정치를 끝낼 방법은 무엇이고 죽음의 사선에서 생명의 불씨를 살릴 방안은 어디에 있는가.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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