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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가장 유명한 언명 중 하나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일 것이다. 혁명의 시대 20세기는 그렇게 권력을 만들었다. 야망가의 혁명이든, 민중의 혁명이든 20세기 권력은 피의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지난겨울 한국사회의 혁명은 따뜻했다. 그 광장엔 피와 야만의 흔적은 없었다. 지난 4년 총구 권력의 위압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마음들의 축복이었다.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다수를 만든다”고 했지만, 그 광장에선 서로 이어진 다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를 불러냈다.

광장의 마음들은 이제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다. 국가 시스템이 파괴된 폐허 속에서, 우리 사회를 묶고 진전시켜갈 ‘진정한 권력’을 어디서부터 세울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는 대선의 시공간과 맞물려 근본적인 물음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동안은 옳고 그름을 말하는 시대였다면, (이제) 공감을 말하는 시대였으면 한다.”

경향신문이 ‘민주주의 기획’을 위해 만난 시민 100명 중 21살 휴학생의 이야기다. “요새는 잘 태어나는 게 답인 거 같다”는 아픈 삶의 고백들 속에 그들이 정말 목말라 한 것은 “아버지와 상사가 비민주라면 무너트릴 수도 없다”는 토로처럼 이해와 공감이었다.

민주화 30년을 지나는 ‘21세기 권력’은 ‘이해’에서 나온다. 아니 나와야 한다. 수권능력은 곧 국민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는 결국 공감하는 능력이며 유연함·성실·포용을 속성으로 한다. 달라서 배척하는 것이 아닌 달라서 존중하는, 존중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권력이 총구가 아닌 이해에 기반을 둘 때 시민의 마음을 얻는 진정한 권력으로 매김할 수 있다. 그런 권력은 품이 넓다.

대선은 어떤 권력이 위임을 받을지 선택하는 시험대다. 이번 대선은 촛불의 열망이 선택으로 이어져야 하는 과제와 함께다. 지금 권력을 위임받으려는 자들은 모두 국가와 시민,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과연 이들은 21세기 권력의 본질에 얼마나 부합할까.

자타공인 1등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우 가장 미묘하다. 많은 이들의 “사람 좋다”는 평가는 포용의 다른 면일 수 있지만, 동시에 ‘측근·폐쇄성·패권’ 등의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일부 주변에선 그를 ‘샤이’라는 단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해능력’도 행동과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사례다.

보수의 희망(?)처럼 등장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선 정말 ‘이야기’할 게 없다. 평생 그가 ‘윗사람’들 외에 이해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를 향한 이해는 순종이나 아첨뿐일 수 있다. 현재로선 ‘판단 불능’이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사이다’라는 말처럼 속을 뚫어주는 ‘케미’가 있다. 대중의 환호는 그들 요구를 이해한다는 현상적 표현일 수 있다. 문제는 ‘사이다’류 이해가 능력인지, 전략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과도한 전략으로서 이해는 진심 없는 선동이 되기 쉽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이해 능력’과 ‘학습 능력’이 여전히 헷갈린다. 4·13 총선 승리 같은 일들이 정말 민심을 이해한 덕분인지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그저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지난 대선을 함께한 참모들이 떠난 것도 ‘이해 부족’의 증좌로 비칠 수 있다.

여권의 다크호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하는 ‘헌법 1조’가 이해·공감 능력의 정점인 것처럼 결론나고 있다. 그 이후 진보는 안 보인다. 외려 “빨갱이”류 색깔론으로 퇴행했다. ‘신상품’을 내놔야 할 시점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가장 호평을 받는다. 보수 인사들조차 그의 행보를 높이 평가할 정도다. 하지만 정곡을 찔러 득점으로 이어가지는 못하고 있다. 지나친 무거움 때문인지, 정치적 모호함을 이해로 포장한 것으로 의심받는 때문인지는 자문해볼 일이다.

지금 국가의 분열은 위임 권력이 낡은 총구 권력에 기대었기 때문일 것이다. 놈 촘스키는 “(정부가) 야만적 무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도 국민의 정신통제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민주 국가의 정부는 국민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아붓는다”고 질타했다. 권력이 이해를 포기하고 손쉬운 통제에 기대려는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잔혹하고 달콤한 유혹이다.

여러분은 앞서 대권주자들 중 누가 가장 당신을 존중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무도 없는가. 모두 피 내음만 가득한 야수들의 다툼인가. 그 선택은 우리 사회와 국가가 존중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일 수 있다. “무릇 군주는 인간의 법과 짐승의 힘을 결합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총구 앞에 다시 당신을 바칠 것인가.

김광호 정치·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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