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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김윤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의 타계 소식을 들은 뒤 오래전 들은 얘기 하나가 떠올랐다. 30여년 전 고인의 강의 시간에 들은 얘기다.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과연 고인이 한 얘기가 맞는지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대학 신입생이던 어린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대략 이런 취지였다.

‘국립대를 다니는 여러분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화장실만 봐도 그렇다. 다른 대학에 가봐라. 이렇게 좋은 화장실이 이렇게 많이 있는 대학이 없다. 그러니 여러분은 혜택을 받은 만큼 갚아야 한다.’

고인이 왜 굳이 화장실을 예로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사회에서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고. 고인이 말년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난 19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전직 대법관으로는 처음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사법농단’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승리’의 주인공에겐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중학교 담임교사는 그에게 서울의 환일고 야간부를 추천했다. 그를 보살펴줄 독지가도 소개해줬다. 그는 자식이 없던 이 독지가 부부를 양부모로 모시면서 환일고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판사가 됐다. 결혼식 때도 친부모와 함께 양부모를 모셨고,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상가를 지켰을 만큼 양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범죄 피의자가 돼 구속을 눈앞에 두고 있다니. 무슨 죄를 지었을까. 그가 받고 있는 혐의는 많다. 무려 30개에 이른다. 법원행정처장을 지낼 당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민사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 원세훈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판결,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소송 등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최고 사법기관’이라는 대법원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재판소 내부정보를 수집하고 일선 법원의 위헌제청 결정을 취소한 혐의도 있다.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소모임, 인터넷 카페 ‘이판사판 야단법석’, 대한변호사협회 등을 와해시키거나 압박하고 차성안·박노수 등 현직 판사를 사찰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의 범죄 혐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검찰이 수사 중인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 의료진’인 박채윤씨의 특허소송 개입 등도 수사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검찰에 출석하면서 “법관으로 평생 봉직하는 동안 나름 최선을 다했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사심 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 한 일의 결과, 법원은 지금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 지난 27일에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은 70대 남성이 김명수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통 때라면 개인의 일탈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사건이지만, 지금은 모두가 사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법관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일반 공무원은 행정고시에 합격해도 5급으로 시작하지만 판사는 임용되면 3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다. 지법 부장판사는 1급, 고법 부장판사는 차관급, 대법관은 장관급으로 대우받는다. 신분도 특별하다. 재판에서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자신의 양심 이외에는 어떠한 외부적 간섭이나 영향도 받지 않도록 보장을 받는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징계나 형사상의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는다.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이 아니면 면직되지도 않는다. 사회적으로 이만큼의 대우를 받는다면, 이를 갚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은혜를 베풀어준 양부모를 잊지 않고, 법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법관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증자는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을 남겼다. ‘남을 위함에 최선을 다했는가’ ‘벗과 사귐에 있어 신용을 잃지는 않았는가’ ‘스승에게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겼는가’, 이 세 가지를 그는 매일 되돌아봤다고 한다. 공직자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큰 공직자가 자기 앞만 챙겨서는 안될 것이다. ‘일일삼성’이 아니라 ‘일일사성’은 해야 공직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일일십성’ ‘일일백성’도 부족할 수 있다. 공직자의 되돌아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김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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