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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은 용기입니다. 세금을 더 내겠다는 것도, 세금을 더 내달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문재인 정부 증세안이 논란 끝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상을 ‘핀셋’처럼 특정한 증세안입니다. ‘슈퍼리치 증세’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예상대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포괄적 증세’ 요구와 ‘세금폭탄’ 논쟁까지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불만족’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증세가 논쟁 중심에 선 지금의 현상이 반갑습니다. 증세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警氣)부터 일으키던 우리 사회, 특히 정치권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집권 여당부터 질색합니다. 2014년 새누리당이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임대소득 과세 방침에 “책상머리 정책”이라며 난타하던 풍경이 단적입니다. 박근혜 청와대 위세에 숨죽이던 새누리당이 유일하게 한목소리로 정부를 질타한 기억입니다.

세금을 더 내라는데 부처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장 내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가는데 표정이 반듯할 순 없지요. 정약용 선생조차 ‘세외전(稅外田)’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밭을 기뻐했음(<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 박석무)을 보면 인간 본능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치 세력이 세금을 내리긴 쉬워도 올리는 건 지난합니다. 미래 국가재정조차 방기할 만큼 포퓰리즘의 대상입니다. ‘세금 포퓰리즘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해온 이유입니다. ‘증세 없는 복지’를 내걸었기에 ‘증세’를 증세라 하지조차 못했던 박근혜 정부의 초라한 초상(肖像)이 떠오릅니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요.

문재인 정부 출범은 경제에 있어서 ‘패러다임 시프트’라 할 정도의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그 핵심이 ‘소득주도 성장론’입니다. ‘임금 상승-소비 촉진-생산 증가’의 선순환으로 경제성장과 복지를 모두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낙수효과’에 기반을 둔 전통적 성장론이 ‘톱·다운’이라면 소득주도 성장은 뿌리에서 시작해 입과 꽃·열매로 영양이 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론 세상은 고용 없는 성장에 ‘로봇세’까지 거론되는데, 여전히 낙수효과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은 ‘실험 정책’이라고 비난합니다.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의 ‘대한민국 미래전략보고서 2017’에서 석학들은 “정부는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완화를 위해 부득이하게 재정적 개입, 즉 2차 소득분배를 하게 된다”고 미래를 전망했습니다. 분배와 증세는 어느 정부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이야기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토로했지만, 정치 세력에게 세금정책은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을 다시 가져와 주인인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방도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대선 당시부터 문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조차 내내 부족함으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증세에 대한 모호함 한 가지로 집약될 것 같습니다. ‘핀셋 증세’로 마련될 24조원(5년간)으로 문재인 정부 정책 재원이 충분하다고 느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금 정책의 핵심이 일관성·예측가능성임을 생각하면 “증세를 하더라도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다. (임기)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는 문 대통령 발언은 두고두고 발목이 잡힐 것 같습니다. ‘세금 포퓰리즘의 유령’과의 싸움에서 지나친 조심스러움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두려움은 새누리당이 이율배반적으로 ‘담뱃값 인하’를 ‘서민 감세’로 둔갑시키며 공격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결국 세금은 정권의 결단과 용기가 중요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이 실패로 끝난 2005년 10월 초 참모들에게 “내년 1월을 겨냥한 정치담론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증세·복지국가’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증세를 ‘정치 담론’ 차원으로 고민하고 결단한 것입니다.

시민들은 이제 용기를 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누가 보면 전경련 사람인 줄 알 법한 남편 왈. “우리가 이렇게 세금을 내니까 ○○이 얼집(어린이집) 돈 안내고 다니는 거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라는 후배의 페이스북 글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복지의 효능감’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증세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상 증세를 둘러싼 12년 전과 달라진 풍경은 그사이 진전된 복지와 효능감이 원인입니다. 복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재투자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권력의 주인들은 그 세월 동안 바뀌어 왔는데, 여전히 정치만 ‘세금 포퓰리즘의 유령’에 지레 사로잡힌 건 아닐까요.

문재인 정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담대한 도전입니다. 모든 용감한 것은 두려움과 싸우며 커갑니다. 두려움 없는 용기는 없습니다.

김광호 정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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