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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책들은 보통 찬반이 갈리고 의견이 나뉘게 마련이지만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만큼 모든 사람들이 일관되게 ‘증오’하는 정책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지난 대선 당시 거의 모든 후보들이 이를 없애겠다고 공약하였고, 최근 발표된 문재인 정부의 국정 5개년 계획 또한 2020년까지 그 폐지를 명시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2014년에 외국인들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 때문에 ‘천송이 코트’를 살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누구나 없애고자 하는 적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왜 아직도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며, 나는 이것이 사소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가 상호작용하는 비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를 ‘문과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공인인증서 화면

마을 장터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전자상거래의 최소한의 규칙을 국가가 제공하고 집행하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대면접촉이 없는 온라인에서는 오히려 갈등과 사기의 여지가 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자상거래를 규제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은 공인인증서라는 주민등록증의 온라인 버전이었다. 익숙하다는 점에서 국가의 손쉬운 선택이었지만,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가주의의 잔재인 주민등록제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호환성의 가능성은 이미 닫혀버렸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책임질 수 없고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국가가 스스로 짊어졌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뒤의 누군가가 공인인증서의 주인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아직 없으며,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미 선거를 각자 컴퓨터 앞에서 치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국가주의로만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한국의 국가가 해결하는 방식은 더 심각한 국가주의였다. 공인인증과정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자들은 그것을 읽는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하고, 미래의 해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키보드 기록방지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며, 감염될지 모를 미지의 문제들을 미리 방지하는 백신과 ‘보안프로그램’들을 국가가 알아서 개인의 컴퓨터에 자동적으로 ‘먹이는’ 것이 액티브엑스가 아니었던가. 마치 미지의 범죄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수색요원들이 집 안 곳곳을 뒤질 수 있도록 뒷문을 열어두는 것처럼 말이다.

공인인증서나 액티브엑스 하나 없이 애플은 1000억개 이상의 앱을 팔았다. 인터넷 뱅킹과 온라인 거래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국가가 개인의 컴퓨터를 ‘소독’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유독 우리의 국가만 개인들의 세세한 거래과정에 틈입해서 효율적이지도, 안전하지도, 국제적이지도 않은 시스템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임도 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으며 이상의 문제들이 해결될 때에야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는 최종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첫째, 우리의 공인인증제는 국가가 모든 것을 ‘방역’한 이후 발생하는 어떠한 문제도 사용자에게 전가하는 ‘편리함’ 위에 유지된다. 일단 필요한 절차만 밟고 나면 국가도, 은행도, 판매자도 책임에서 벗어나고 모든 책임은 신성한 공인인증서를 잘못 사용한 개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독 한국에서 빈번한 온라인 범죄와 금융 사기의 책임을 개인들이 진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둘째, 국가가 개인의 모든 거래행위에 개입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이권이 무엇이며 어디로 향하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공인인증서를 발급하고 관리하며 비밀번호 생성기와 지문인식기를 구입하고 교체하는 데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은행과 업체들이 당연히 부담해야 할 보안 솔루션 개발비 대신 이들은 확실하고 총체적으로 책임을 면해줄 공인인증 시스템의 유지 비용을 기쁘게 지불하고 있겠지만 결국 그 비용은 개인 사용자와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을 것이다.

셋째, 이것은 정부가 나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국가주의적 잔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부가 우측통행을 ‘시행’하고 축의금 액수를 지정해주며 교과서를 국정화한 지난 몇 년은 시민들의 역량이 퇴행하고 기업들이 게을러진 시기기도 하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나는 내 컴퓨터에서 국가와 국가주의를 몰아내는 데서 시작하고 싶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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