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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국립생태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인터뷰했을 때 슬그머니 물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을 여성비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최 교수는 몇몇 학자들이 잘못 소개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2004년 여성단체연합으로부터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과학적 근거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했다는 공로였다.

최근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한 안경환 서울대 교수의 책 <남자란 무엇인가>가 여성비하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몰래 혼인신고’ ‘여자와 술’ 같은 내용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 부분은 빼고 진화론과 관련된 부분만 보자.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약하게 진화되어 있다. 여자는 생존을 보장해주는 한 남자와 안정된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지만 난교는 남자의 생래적 특징이다.’

난교가 남자의 본성? 페미니스트, 아니 (남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발끈했다. 진화론은 정말 남성의 바람기를 정당화하는가?

최재천 국립 생태원장. 박민규 기자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후손, 즉 DNA를 남기려고 한다. 이게 진화 법칙의 골자다.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윌슨은 최재천 교수의 스승이다. ‘여성은 평생 겨우 400개 정도의 난자만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중 기껏해야 20개만이 건강한 아기로 태어날 수 있다. 갓난아이를 나이가 찰 때까지 기르고 그 후에도 보살피는 데 드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엄청나다. 반면 남성은 한 번 사정할 때마다 1억마리의 정자를 방출한다.’

남성은 자신의 DNA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퍼뜨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거고, 여성은 남성이 아이만 낳고 육아에 힘을 보태지 않을 경우 낭패를 당할 위험이 있어 믿음직한 남자를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도‘남성에게는 일반적으로 난혼 경향이 있고 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의 경향이 있다’고 했지만 인간사회의 진화는 문화적이라고 했다. ‘난혼 사회도 있고 하렘제에 기초한 사회도 많다. 이 놀랄 만한 다양성은 인간의 생활양식이 유전자가 아닌 오히려 문화에 의해 주로 결정됨을 시사하고 있다.’(<이기적 유전자>)

페미니스트들은 진화론, 특히 진화심리학을 비판하는 것은 많은 가설이 그 복잡한 남녀관계, 성 인식 문제를 번식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고 비판한다. “남자가 다 바람둥이가 아닌 것처럼, 여성도 번식이 아닌 즐기기 위해 섹스를 한다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본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컷의 바람기가 본성이라면 바람피운 남편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거야?”

사실 남성과 여성의 본성이 있다는 생각은 성적 역할을 나누는 논리로 이용돼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은 적극적이어야 하고, 여성은 신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건 남성은 중요한 자리에서 리더적 자질을 발휘해야 하고, 여성은 집안살림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로 변형된다. 페미니즘은 그동안 수많은 노력을 통해 무너뜨리려고 했던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진화론이 자칫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복구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우려도 있다. ‘과학적 방법은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사실처럼 들리게 하는 것이다. (중략) 처음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처럼 보이던 것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믿음으로 굳어지는 것이다.’(<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진화론은 본성이라는 이유로 남녀차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성평등 시각도 있다.

진화론자들은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생존에 중요하다고 본다. 세라 블래퍼 허디는 <어머니의 탄생>에서 ‘(중략) 최고 사냥꾼의 아이들이 잘 먹는 까닭이 아버지가 더 많은 고기를 가져다주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장 뛰어난 채집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해서였다’고 썼다. 진화론에 비춰보면 동성애도 자연계에 흔한 현상이다. 최재천은 동물의 동성애 현상을 관찰한 책이 작은 백과사전 두께만 하다고 했다.

성 차별은 과학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 힘의 역학과 권력 관계 속에 생겨난다. 이동성이 중요하고, 타 부족과 갈등할 수밖에 없는 유목민족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성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성평등적인 부족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군장사회로 발전하면서 통한 정복의 역사가 진행됐고, 남성의 권력이 강화됐다. 현대사회에서는 상급자 여성이 하급자 남성을 성희롱하기도 한다.

과학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적 증거는 높은 설득력을 얻고 진실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과학을 말할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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