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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우열반 편성을 안 하는 이유가 뭐예요.”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섞어놓으면 학습능률이 떨어지는 건 뻔하잖아요.” “어차피 대학 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된 것이고, 몬가는 학생은 몬가는 기예요.” “보충수업은 어떻게 하실 거죠. 대학생 과외도 허용된 이 마당에 과외를 못할 것도 없지만요, 그래도 어디 대학생들이 선생님들만 하겠어요.” “아니 무슨 체육시간이 일주일에 세 시간이나 돼요. 애들이 피곤해 해요.” “음악, 미술은 시험과목에 없는데 빼는 게 어때요.” “점심시간 50분을 20분으로 줄이고 30분은 자율학습을 시켜주세요.” “도서관 이용은 성적순으로 해주세요.”

1989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한 장면이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성적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교직원들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이들의 요구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영화는 1986년 1월15일 새벽,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중학교 3학년생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전교 1등을 하던 이 학생의 유서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이은주(이미연)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된다.

“난 1등 같은 건 싫은데, 난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이 되기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정말 남을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슬픈 것을 보면 울 줄도 알고, 재밌는 얘기를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인데. 엄만 언제나 내게 말했어, 그러면 불행해진다고.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엄마, 성적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미워해야 하고 성적 때문에 친구가 친구를 미워해야 하는데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나님 왜 이렇게 무서운 세상을 만드셨나요. 선생님 왜 우릴 이렇게 무서운 세상에 살게 내버려두셨나요.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서울교육단체협의회, 특권학교폐지촛불시민행동 등 교육,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시교육청 앞에서 이날 발표된 자립형사립고 운영평가 결과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을 성적으로 줄 세우지 말라는, 목숨을 던져 외친 이 중학생의 호소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에 대한 반성도 컸다. 영화가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김대중 정부가 교육부의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꿀 때부터 알아봤다. 사람을 ‘인적자원’이라니. 영화 주인공의 얘기처럼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사람을 인적자원이라고 하는 정부가 ‘줄 세우기’를 없애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한다며 ‘자립형 사립고’라는 것을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이명박 정부는 한술 더 떴다. 교육의 효율성, 자율과 경쟁이라는 명분을 들어 ‘자율형 사립고’를 대거 세웠다.

그래서 결과는. 한국의 경쟁력은 최고 수준이 됐나. 일본이 몇 가지 핵심 부품·소재의 수출을 막았다고 나라 전체에 비상이 걸리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교육은 실패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모두 의대를 가겠다고 하는 현상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공부를 잘하면 당연히 의대를 가야 한다고 해서 온 학생들도 있다”(이재영 서울대 의대 교수)며 대학이 학생들에게 다른 길을 찾아주는 것은 ‘줄 세우기’ 교육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사람들은 만족해 하고 있는가.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세계 12위였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192개국 중 30위로 준수하다. 하지만 행복지수는 경제적 성과에 훨씬 못미친다. 유엔에서 발표한 ‘2019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54개국 가운데 54위다. 싱가포르·일본 등과 함께 1인당 국민총소득 30위권 국가 중에서 행복지수와 차이가 큰 나라에 속했다. 특히 ‘긍정적인 정서’ 순위가 101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왜 우리는 경제수준에 비해 행복지수가 떨어질까. 아마 잘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비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교육 과잉은 개인적으로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면서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입시 명문으로 유명한 특목고에 진학한 자녀가 경쟁에 견디지 못해 가출했다는 지인들의 얘기를 지금도 가끔 듣는다. 학교를 뛰쳐나간 자녀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PC방에서 함께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목적은 1등이 아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막는 것이라면 자사고든 뭐든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어른들의 일이고, 정부의 일이다.

<김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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