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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관은 특성상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든다. 안보와 국익이 걸린 ‘소리 없는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미국과 영국, 소련 첩보기관 간 경쟁과 암투는 살인과 납치를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분단 상태인 남북한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가 종식되면서 각국 첩보기관은 환골탈태했다. 법도 없이,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던 영국 첩보기관 MI6의 조직과 활동 및 예산을 규율하는 법을 제정해 국회의 통제를 받도록 한 1993년 보수당 존 메이저 정부 사례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 오류로 엄청난 국제적 재앙을 초래하고, 이어진 테러리즘과 싸우는 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법과 윤리의 기준에서 정보기관은 늘 골치 아픈 대상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 정보기관의 일탈과 불법은 언제나 ‘안보 유지를 위한 필요악’이라는 방어 논리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다. ‘안보와 국익을 위한다’는 의도와 목적의 정당성만큼은 크게 의심받지 않는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와 스노든의 폭로 이후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의 지나친 불법성은 용납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정보기관들 사이에 또 한 번의 환골탈태가 예상된다. 대한민국 국정원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4일 국회 정문 앞에서 '국정원 해킹감청프로그램 사용 사이버사찰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_ 경향DB



우선, ‘의도와 목적의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안보와 국익’이 아니라 고위 간부들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권력자 개인이나 특정 정파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의혹이 퍼져 있다. 헌법이 파괴되고, 국민이 분열되고, 국가경쟁력이 약화되고, 적국에 이익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출세와 영달을 좌우하는 권력자와 그 집단이 원한다면 선거에도 개입하고, 간첩의 누명도 씌우고, 도청과 미행과 사찰도 하고, 국가 기밀도 공개해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범법과 일탈의 낮은 수준과 치졸함이다. 외국 사절의 호텔 방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를 훔쳐 보다가 들킨 뒤 도주했다가 경찰관에게 체포당하고, 시민단체 간부를 미행하다가 들켜 붙잡히고, 중국의 국경검문소 공문서를 위조해 엉뚱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정보원들의 신상을 공개해 대북 휴민트를 와해하고, 오피스텔에 숨어들어 낯뜨거운 정치적 비방 댓글을 작성해 대량 유포하고, 남북 정상 간 대화록을 왜곡해 공개하는 등 어설픈 범죄집단 같은 모습에 국민은 허탈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외국 민간회사의 사이버해킹과 도청 장비를 구입해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사용하는 악성코드 유포를 통한 스미싱 범죄를 저질러온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대표상품인 삼성 휴대전화 갤럭시 시리즈를 해킹할 수 있도록 돈과 장비를 외국 업체에 제공한 정황마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 문제는, 불법이 적발되어도 진실 공개와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언론을 통제하고, 비판하는 지식인을 고소하고, 북한 관련 기밀을 공개해 시선을 돌리고, 검찰과 사법부를 겁박해 정의의 칼을 썩고 녹슬게 하면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기에 바빴다. 한쪽으론 “안보와 국익을 위해서 애국의 심정으로 그랬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감안해 달라”는 면구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안보’와 ‘국익’, 그리고 ‘애국’이라는 소중하고 숭고한 뜻을 더럽히고 훼손해온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국정원 때문에 심각한 걱정을 하고 있다. 세금이 아까워서만이 아니다. 우방이라고는 하지만 외국에 국가안보를 통째로 내맡기고, 권력자 개인과 특정 정파의 이익만을 위해 불법과 일탈과 조작을 일삼는 정보기관에 어떻게 나라와 민족과 자손의 장래를 맡길 수 있겠느냐는 걱정인 것이다.

국정원에도 진정한 정보 전문가, 첩보요원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보와 국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참애국자들’이다. 그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권력의 찌꺼기를 탐하는 정치관료들을 청산해야 한다. 아울러 제도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걱정원’이 아닌, 진정한 안보와 국익의 파수꾼인 ‘국정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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