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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행복의 조건’을 연구한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루트 비엔호벤은 ‘안전’이 행복의 필요조건이며 선결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헌법 전문에도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회와 국민의 안전인 ‘공공 안전’의 위협요소는 크게 전쟁, 재해와 재난, 범죄, 질병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모두 ‘예방’이 최우선 과제요 이미 위험이 발생한 뒤엔 아무리 잘 대처해도 사후약방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대한민국엔 공공보건을 해칠 감염병 예방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문외한으로 가득 차 있고, 전문기관인 질병관리본부는 책임과 권한, 역량과 리더십 없이 우왕좌왕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 이미 세계보건기구에서 올봄 메르스의 창궐을 경고했음에도 전혀 국가적 대비가 없었고, 중동에서 귀국한 최초 의심환자 발생 시에도 신속한 격리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수한 2차, 3차, 4차 감염자가 발생하도록 조장했다.

병을 발견하고 고쳐야 할 병원이 오히려 병을 확산하고 전파하는 구조와 체제, 관행 속에 운영되도록 방치해 놓고는 시민들의 습관 탓만 한다. 의료수가와 예산 타령을 하지만, 미용 성형과 부유층의 원기충전 등 건강이나 안전과 무관한 ‘사치성 의료산업’은 공룡처럼 거대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 책임자와 정치인들은 전문가 중심의 체계적인 대응을 지원하기보다 공격과 방어, 이미지 관리 등 ‘메르스 정치’하기에 바쁘다. 그런가 하면, 세월호 참사를 부른 ‘적폐’는 그 실체를 털끝도 드러내지 않은 채 암약하고 있어 언제 또 유사한 재난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메르스 국내 발병 한 달을 앞둔 18일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광화문 횡단보도를 걸어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여름 태풍과 집중호우 등 재해 예방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불안하기만 할 뿐이다. 범죄위험 역시 마찬가지다. 묻지마 살인, 연쇄살인, 토막살인, 아동학대 살인 등 끔찍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CCTV를 설치한다, 형량을 늘린다, 전자발찌를 채운다며 앞다퉈 목소리 높이기 경쟁을 하지만 정작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과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예방책은 제대로 구축된 적이 없다. 감염병의 원인균과 바이러스가 생성되고 전파되고 확산되는 조건과 경로를 찾아 미리 차단하고 대비하는 예방의학적 대책처럼, 범죄의 원인을 근본부터 차단해야 한다. 가정붕괴의 원인인 가정폭력과 부모의 양육 기술 부족으로부터 학교의 사회화 기능 붕괴에 이르는 조건과 경로를 찾아 고치고, 학교 이탈 청소년 보호 및 선도와 초범자의 재범방지, 우범환경의 개선과 마을 공동체의 부활에 이르는 전반적인 범죄예방 관리를 책임지고 추진해 나가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쟁으로부터 사회와 국민을 지켜내는 국방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 억지력 확보를 위한 튼튼한 주도적 군사전력의 확보는 물론이고, 아예 도발 의도 자체를 봉쇄하는 능란한 외교와 대북 정책을 통해 국민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국방 책임자들의 언행에 따르면 북한의 32배가 넘는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쓰면서도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북에 비해 열세라고 하니, 국민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다. 전력 열세 때문인지, 외교력 부재가 원인인지, 남북화해 기조를 버린 정책 탓인지, 국정원이나 국방부에선 툭하면 북한발 위험과 위기를 경고한다. 그럴 때마다 정치인들은 군복을 입고 전방부대를 찾거나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과시한다. 위정자의 허물을 덮기 위한 구호로만 안보와 안전을 외칠 것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이라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4가지 위험요인에 대한 철저한 예방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불거질 불편과 불만, 불이익에 대한 반발을 정치력으로 극복해야 한다. 위정자는 재난과 전염병과 범죄와 북한의 도발로 소중한 목숨을 잃은 국민과 장병 한 명 한 명, 모두 국가와 정부의 책임이라는 엄중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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