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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된 이후, 부패된 시신의 신원확인과 사인, 사망시간 추정 등을 둘러 싼 논란이 식을 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그 와중에 포천의 한 다세대 주택 안에서 발견된 두 남자의 시신 역시 부패된 상태였으며, 그 중 피의자의 남편으로 확인된 시신의 사망 시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렇듯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는 사건 뿐 아니라 미제 사건으로 남거나 사건의 진실을 둘러 싼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배경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초동조치의 실패’와 ‘증거 불충분’의 문제다. 유병언 전 회장 시신 문제 역시 정부와 권력에 대한 불신 등 ‘정치적’인 문제가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변사체가 발견되었던 당시 초기에 경찰이 현장을 통제하고 보존한 뒤 시신 및 주변에 대한 철저한 현장 과학수사를 실시해 제3자의 족적과 유류물, 미세증거 및 DNA를 추출할 수 있는 체세포의 존재 여부를 밝혔더라면 ‘국과수의 신뢰위기’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현장이 훼손되기 전에 시신으로부터 송치재 별장에 이르는 추정 이동경로에 대한 철저한 과학수사가 이루어졌었더라면 족적과 사라진 안경 및 이동흔적의 발견 등을 통해 ‘사건의 재구성’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다른 사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치부’가 드러날 때 마다 경찰이나 검찰, 그리고 정부와 국가는 ‘관련자 문책’이라는 미봉책과 대증요법으로 상처를 숨겨왔다피부 안쪽에선 곪고 썩어문드러지고 있는데, 표면에 피부색의 반창고를 붙여 감추고 아프지 않은 체를 해 온 것이다.

최초 현장에 출동하는 순찰 경찰관들부터 과학수사의 기본과 현장 보존 및 기록 조치를 정확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하며, 두 번 생각할 필요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훈련이 돼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경찰서 단위의 과학수사 요원과 지방경찰청 단위의 과학수사 요원의 자격과 교육 및 장비는 물론, 이들이 적절한 교대와 휴식 및 연수와 학습을 해 ‘최선의 상태, 최신 기술’을 유지하고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작년 한림대학교 사회경영1관 사회심리실험실에서 열린 제1회 과학수사(CSI) 경진대회에서 대학생들이 모의 범죄현장을 관찰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2009년 미국 범죄 수사 및 법조계는 ‘미국 과학회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의 과학수사제도 분석 보고서(NAS Report)로 인해 발칵 뒤집힌적이 있다. 유전자(DNA) 감식 분야를 제외한 모든 과학수사 분야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과학수사 요원의 자격과 훈련, 업무 체제 및 사용 장비와 기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이후 미국 연방정부와 국회는 과학수사 제도의 문제점 개선과 발전을 위한 개혁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 과학수사 요원과 국과수 법의관, 법과학자들은 ‘열악한 여건’하에서도 최선을 다해 범죄사건의 진실을 밝혀내 오고 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열악한 환경’에서 희생하는 개인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경찰과 검찰, 군 수사기관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과학수사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조사와 문제점 및 그 원인들을 밝혀낸 뒤 개혁하고 개선하고 지원하고 발전시키는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형 NAS Report’ 가 나와야 한다.

마치 ‘양치기 소년’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채, 가장 중요한 ‘신뢰’를 잃어버린 대한민국 과학수사 시스템은 국가적 비용과 혼란, 국론의 분열을 야기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김훈 중위 사망 등 군 의문사 사건들과 천안함 침몰 등 국가적 사건, 세월호 침몰이나 유병언 전 회장 사망 등 정치적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는 사건들은 물론, 미궁에 빠지고 미제사건으로 남거나,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심증은 분명한데 물증이 없다는 고전적 대사만 읊조리는 안타까운 사건들의 원인으로 작용한 ‘과학수사 시스템’의 문제, 증상의 일부가 발견돼 관심을 받고있는 지금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한 채 병이 깊어지기만 하는, 난치병이 될 수도 있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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