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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형법상 ‘강간’ 및 ‘강제추행’ 등의 범죄를 더 이상 ‘정조에 관한 죄’로 부르지 않게 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정조’ 개념은 법적으로 폐기됐다. 구시대적인 ‘정조’ 대신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삼국시대 ‘삼종지도’로부터 시작되고 유교에 의해 강화된 ‘정조’ 개념은 성을 본인,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가족과 가문의 ‘재산’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반인권적’이다. 지금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혼외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아버지나 오빠가 살해하는 ‘명예살인’이 대표적인 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또 다른 측면은 ‘성 미성년자’ 개념이다. 즉, 아직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질 만한 연령에 도달하지 못한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개념이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성인이 14세 미만 어린이와 성관계를 가질 경우에만 ‘의제 강간’이라는 용어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마저도 ‘동의’가 있다면 형을 줄여준다.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을 도입한 많은 나라에서 ‘성적 미성년자’ 연령은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와 유사하다. 벨기에, 스위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많은 국가에서 16세 미만을 ‘성 미성년자’ 연령으로 두고 있다. 우리가 외신으로 접하는 ‘제자와 성관계를 가진 교사 체포’의 근거다. 성인이 16세 미만 ‘성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성범죄로 처벌받는 것이다.

우리도 물론 ‘아동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에서 위력이나 위계 혹은 금품 등 대가를 사용해 미성년자의 성을 착취할 경우 처벌하도록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16세’가 되면 부모의 허락 하에 결혼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18세’에 이르러야 부모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도록 한 민법의 입장과 달리 ‘14세 미만’을 ‘성 미성년자’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 형사법 체계는 15~18세 청소년들을 ‘성적 대상물’, ‘성 사냥감’으로 내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 이상 성인이 사회경험과 경제력의 차이 등에 기반을 둔 부당하고 불순한 유혹이나 감언이설을 통해 ‘동의’만 이끌어낸다면, 14세 이상 청소년과의 성관계가 ‘합법’으로 인정받아 단속이나 수사, 처벌을 받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0월에 있었던 사단장 성추행 사건 (출처 : 경향DB)



사법부의 태도는 더욱 심각하다. 최근 대법원은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15세 여중생 연예인 지망생을 오랫동안 성적으로 유린하고 착취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두 사람 간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시지에서 애정과 동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무죄”라며 그나마 실낱같은 청소년 성 보호 장치인 ‘아동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의 취지마저 짓밟아버렸다.

전 법무차관, 전 국회의장, 전 검찰총장이 딸이나 손녀 같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유린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파괴해도, 현직 제주지검장이 늦은 밤 공공장소, 귀가하던 여고생 앞에서 음란행위를 해도 기소나 처벌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검찰과 사법부의 ‘후진적 성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을 듯하다.

대한민국에서는 힘이나 돈을 가진 자들이 뭇 여성들을 ‘성적 대상’, ‘성 상품’으로 쳐다보며 쇼핑하듯 상대를 골라 마음껏 유린해도, 소설 <로리타>의 낭만적인 로맨스로 미화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몹쓸 병’에 걸린 동정의 대상이 되어 보호된다. 그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권력의 집사 역할을 해주는 대가로 실정법과 그 입법 취지를 무시하고 파괴할 수 있는 ‘절대 반지’를 움켜쥔 판검사들이거나, 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성폭력 등 ‘4대 악 척결’을 부르짖는 근엄한 얼굴의 이면에는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성매매와 성착취를 일삼는 주지육림의 추악한 모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성 후진국’ 대한민국, 이대로는 안된다.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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