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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최근작 <죽은 자로 하여금>은 사무장이 운영하는 요양병원의 병폐를 다룬다. 9만명 인구의 소도시 이인시의 한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무주’라는 인물이 종합병원의 비리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주’가 비감 어린 정의감으로 밝혀낸 적폐 당사자는 사실, 거대한 비리의 한 고리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거미줄 같은 비리의 연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사무장병원의 실태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의료행위’보다는 환금성을 지향하는 ‘시장’으로서의 병원에서 ‘환자’는 치료대상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이다. 병원의 목표는 ‘환자의 완치가 아니라 병상이 비지 않는 것’이기에 보험급여의 노인들은 산술에 의해 수급되거나 배제된다. 둘째, 기업으로서의 병원은 제약회사는 물론 기타 의료 관련 업체들과 부풀리기식 거래를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이 종합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의료진도 예외 없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사기와 거짓을 묵인하고, 그리하여 거대한 타락의 씨줄과 날줄로서 부패를 양산하는 데 기여한다.

‘무주’는 혁신위원회에서의 활약으로 병원운영의 실권자이자 환자 ‘삐끼’인 ‘이석’의 비리를 적발하고 사직하게 만들지만, 그 행위가 정녕 ‘정의감과 도덕심’의 발로인지 혹은 사무장의 농락에 의한 대리 행위였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태어날 아이를 위한 정의사회 구현이 그의 내부고발을 정당화시켜주었지만 그마저도 유산되고, 상사의 명령에 의해 체납병원비 관리직을 맡게 되자 무주의 고뇌는 더욱 깊어진다. 병원비를 장기체납한 노인 환자를 번쩍 들어 간이침대에 옮기고 쇼핑백에 환자의 초라한 물건을 담아 던질 때, 무주는 이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처럼 ‘악의 평범성’을 상징하는 괴물로 변한다. 괴물은 무주만이 아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늙은 아버지를 묻지도 않고 살려놓았다고 악을 쓰는 자식들, 그리고 자발적으로 타락의 ‘용접공’으로 기능하는 직원들로 확장된다. 무서운 것은 ‘우리’는 결코 ‘그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의 변증법>에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를 부르주아 문명 공포의 두 이름으로 칭했다. 그에 의하면 이 두 괴물은 각각 산업혁명기에 탄생한 노동자와 자본가를 상징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사람의 신체기관을 수집해서 만든 일종의 패치워크 누더기이다. 괴물은 아내를 얻고 인간처럼 살기를 욕망하지만, 그 불가능성을 알고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가족을 살해하고 멀리 달아난다. 프랑코 모레티는 이 “집단적이고 인공적인 피조물”인 괴물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한 소외된 노동의 변증법, 즉 ‘더욱더 기형화되고 야만화되고 무력해지고 노예화되는’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을 읽어낸다. 반면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백작은 이름만 귀족일 뿐, 손수 가사일을 돌보고 사치를 삼가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내면화한 검소한 자본가를 의미한다. 드라큘라는 난폭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으며 다만 한 방울의 피도 허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타인의 피를 빨며 자본의 생리를 실행할 뿐이다. 이 인격화된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을 의미한다.

프랑코 모레티가 부르주아 문명 공포의 상징으로 지목한 두 괴물은 편혜영의 소설에 나오는 괴물들과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에 철심을 박고 누워있는 ‘이석’의 아들이 그렇듯, 병들고 가난한 환자들은 ‘인간’에서 삭제당한 프랑켄슈타인들이고, 이들의 피로 생명을 유지하는 병원은 흡혈귀이다. 그러나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의 경계는 모호하다. 편혜영 소설의 평범한 병원 직원들이 헌신적인 노동자와 비리대행자를 오가듯, 두 괴물을 조합한 닮은꼴들이 주위에 즐비하다. 가정과 직장에서, 거리에서 갑을관계를 수없이 바꿔가며 사는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인가, 드라큘라인가. 조직의 작은 부속품이 되어 성실하게 굴러가는 우리들은 착취자인가, 피착취자인가. 김수영 시처럼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다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선량하기까지 한’ 적들은 사방에 그리고 우리 내부에도 있다는 것, 김수영 말대로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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